ADVERTISEMENT

[중앙 포럼] 확 바꾸든가 아니면 죽든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내가 이회창을 찍지 않은 것은 그를 둘러싼 부패하고 노회한 떨거지들 때문이다." "한나라당은 후궁처럼, 첩처럼 살기로 작정했나." "공천혁명 못하면 무너진다." "이번 총선은 대선의 반전은커녕 완결판이 될 것 같다."

이건 진보주의자들의 얘기가 아니다. 최근 나오고 있는 이른바 보수 논객들의 한나라당 비판이다. 한두명이 아니라 모두 나선 듯하다. 평소 노무현 정권에 대해 결코 우호적이 아니었던 이들이 왜 갑자기 한나라당에 공격의 화살을 돌리고 있을까. 마치 이 땅의 지식인들이 합심해 한나라당을 끝장내기로 작정한 분위기다.

한나라당을 공격해야 지식인 축에 낄 수 있기 때문일까. 천만의 말씀이다. 그들은 시대의 유행처럼 퍼진 진보의 홍수 속에서도 보수주의자를 자처하며 버텨온 인물이다. 정당 지지율이 신생 정당인 열린우리당보다 한참 뒤처져 있는 한나라당에 대한 집단적 가학심리가 작동했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한나라당 스스로 위안할 수는 있을 것이다. 주마가편(走馬可鞭)이라고? 더 잘 달리라는 채찍질을 받을 만큼 한나라당이 신나게 달려본 적이라도 있는가.

그들은 진정한 보수가 무너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한나라당이 지리멸렬하면서 이 땅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가치를 지켜 나가고 발전시켜 가야 할 정치적 세력이 없어질까 우려하는 것이다. 이걸 한나라당에 대한 지지라고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그들은 현재 정치권에서 보수를 대변할 다른 정당을 찾을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이 한나라당에 변화를 주문하는 것뿐이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며, 실패하면 보수도 무너질 것 같은 절박한 심정에서 충고를 하는 셈이다.

오늘의 한나라당 모습은 예고됐던 것이나 마찬가지다. 한국의 보수정당은 엄밀한 의미의 보수정당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보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지켜야할 가치가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고 살아왔다. 그저 대통령에게 순응하고 따라가기만 하면 부와 권세와 명예가 주어졌다. 반공과 친미와 반북과 경제성장이란 단어만 외치면 족했다. 굳이 그 본질이 뭔지, 자유주의와 시장경제가 이 시대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검증해 볼 이유가 없었다. 진보세력이 살아남기 위해 모습을 바꾸고 저변을 넓혀갈 동안 그들은 따뜻한 양지에 안주했다. 그러다가 어느날 갑자기 야당이 됐어도 버릇을 고치지 못했다. 원내 제1당, 여당 같은 야당으로서 먹을 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투쟁 방법도 생존 전략도 몰랐다. 때론 지역감정에 기대어, 때론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을 몰아쳐서 얻는 반사이익만으로 충분히 의원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젠 그런 수법은 통하지 않는다. 盧대통령 지지도 하락이 한나라당 지지도 상승으로 연결되지 않은 지 오래다. 도덕성을 잃어버린 '차떼기' 정당, 시대 변화에 둔감한 기득권 정당에 대해 국민은 관심이 없다. 술자리에서조차 대안(代案)세력으로 취급되지도 않는다. 지금의 한나라당으론 다음 대선에서도 희망이 없다.

한나라당은 지금이라도 보수의 존재가치가 뭔지, 어떤 생존 전략을 구사해야 할지 머리를 싸매야 한다. 그래서 그 기치 아래 당의 노선과 인적 구성, 생존 방식을 확 바꾸어야 한다. 지켜야 할 가치는 표에 손해를 보더라도 과감히 밀어붙이고, 수정해야 할 노선은 가차없이 바꿔야 한다. 이런 몸부림을 보여주지 못할 바엔 차라리 빨리 깨지는 게 낫다. 그래야 그 빈 자리에 건강하고 합리적이며 변화와 개혁을 두려워하지 않는 보수가 들어설 수 있다. 그래야 진보의 독주를 견제하고 국민에게 정치적 대안을 줄 수 있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 기회다.

김두우 논설위원

*** 바로잡습니다

2월 10일자 31면 중앙포럼 본문 중 '走馬可鞭'은 '走馬加鞭'의 잘못이기에 바로잡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