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매뉴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5면

건국 초기 양치기 무리에 불과하던 로마인들이 서방세계 전역을 지배한 원동력은 체계적 ‘매뉴얼(manual·교범)’이었다. 강력한 주변 민족들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조직력이 최우선이었다. 로마는 각종 전투 시나리오별 매뉴얼과 시스템으로 체계적 군사력을 구축,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전쟁에서 패하는 건 용서해도 매뉴얼을 안 지키는 것은 용납하지 않았다.

일본이 로마식 매뉴얼 사회가 된 것은 대규모 지진 등 자연재해가 많았기 때문이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대처방안이 절실했다. 일본의 철저한 매뉴얼 시스템의 최대 수혜자는 기업이었다. 매뉴얼을 통한 품질과 기술력 향상은 고도경제성장을 이끄는 원동력이 됐다. 여기서 질문 하나.

“일본인들은 매뉴얼에 없는 상황이 발생할 경우 어떻게 대처할까요.” 정답은 “아무 대응도 않고 일단 새 매뉴얼을 만든다”이다. 그만큼 일본 사회에서 매뉴얼은 보편적 행동기준을 넘어 절대가치가 됐다.

올 봄 부임한 유명환 주일대사가 일본의 거래은행으로부터 신용카드 사용한도액으로 부여받은 금액은 불과 월 10만 엔(약 80만원). 유 대사가 어이가 없어 지점장을 불러 “아니, 내가 한국 대사이고 여러 나라 다녀 봤지만 이런 경우는 없었는데…”라고 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거래 실적이 없는 신규 고객에게는 여지없이 10만 엔을 적용하는 매뉴얼 때문이다.

잘 만들어진 매뉴얼은 안정과 안심을 준다. 그러나 매뉴얼에 대한 맹종은 사회의 경직성을 초래한다. 매뉴얼에 매이다 보면 창조적·전향적 발상이 막힐 수 있다. ‘되게 하는 것’보다 ‘안 되게 하는 것’에 가치나 사고가 기울게 된다. 최근 43년 만에 실시된 일본의 초· 중학생 학력조사 결과 창조성·응용력 등 유연한 사고를 요하는 문제의 점수가 형편없었던 것도 이 같은 사회분위기와 무관치 않다.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멸망사』를 보면 매뉴얼로 흥한 로마의 멸망 원인 중 하나는 창조력 상실이었다. 매뉴얼의 경시(輕視)도, 절대시도 위험한 것이다.

반대로 매뉴얼이 통하지 않는 순위를 매기면 한국 정치판이 최상위권이 아닐지 싶다. 정치란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하지만 워낙 정치 상황이 수시로 뒤바뀌다 보니 어지럽다. ‘BBK’ ‘삼세판 출마’ ‘대선자금 수첩’ 등 요즘은 하루하루, 아니 매시간 열심히 뉴스를 챙기지 않으면 이야기에 끼일 수 없을 정도다. 만약 일본이었다면 ‘매뉴얼 없는 한국 정치판을 즐기는 매뉴얼’을 만들지도 모를 일이다.

 김현기 도쿄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