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재동국민학교에 다닐 때의 필자 사진. 현재 현대그룹 사옥 자리인 서울 계동의 집에서 찍었다.
염숙경 선생님이 우리 반 담임이었다. 낙제생에서 갑자기 우등생이 된 4학년생인 나는 염 선생님으로부터 귀여움을 한 몸에 받았다. 우리 국민학교에 있는 세 명의 음악 선생님 가운데 특히 염 선생님이 나를 예뻐하고 내 목소리도 좋아했다. 음악 점수는 항상 100점 가까이 나와 나도 신이 나서 노래를 불렀다. 지금 생각하면 변성기 전의 내 목소리가 요즘식으로 하면 ‘보이 소프라노’가 아니었나 한다.
염 선생님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내가 부른 노래가 KBS에서 방송됐다. 지금은 작곡가 이름을 잊어버린 이 동요를 내가 초연한 셈이었다. 그 작곡가가 “이 노래는 꼭 재동국민학교 학생이 불러 달라”며 헌정했는데 그 기회가 내게 온 것이다. 멜로디와 가사는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
“나는 나는 갈 테야. 연못으로 갈 테야. 동그라미 그리러 연못으로 갈 테야”라고 노래하는 곡이었다. 그때는 녹음이나 녹화할 수 있는 장치가 미비했기 때문이었는지 프로그램 진행자와 염 선생님이 방송전 내게 “단 한 번에 끝내야 한다”며 단단히 주의를 줬다. NG 없이 연주를 끝내기 위해 매일 방과 후에 남아 진이 빠질 때까지 연습했다. 공연 당일 방송진행자의 사인이 난 뒤 단 한 번에 노래를 끝내고 칭찬을 받았다. 공개 무대에서 연주한 첫 경험이었다.
나를 무대에 데뷔시킨 염 선생님은 영화관에도 데리고 갈 정도로 귀여워해 줬다. 옛 국립극장 자리에 있던 명동 시공관에서 상영하던 ‘똘똘이의 모험’을 보러 갔을 때 선생님은 자장면을 사주시기도 했다. 라디오의 어린이 시간대 인기 프로였던 ‘똘똘이의 모험’을 영화로 볼 때의 황홀함은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았다.
93년 한 방송국에서 찾고 싶은 사람을 한 명 꼽으라고 해 염 선생님을 찾아 달라고 했더니 놀랍게도 바로 만나게 해 줬다. 거의 50년 만에 함께 재동초등학교를 찾아가 선생님의 반주에 맞춰 ‘달맞이’를 다시 불렀다. 재동국민학교 시절 내가 가장 많이 불렀던 노래다. 녹화를 마친 뒤 선생님을 우리 집으로 모셔와 식사를 대접했다. 노인이 된 스승과 제자의 만남이었다.
어린 내가 꽤 많은 음악적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재동국민학교의 독특한 교육 방식 때문이었다. 당시 그 학교는 예체능 활동에 큰 비중을 뒀었다. 전교생이 과외활동을 하나씩 해야 했다. 월요일 아침에는 간단한 학예회와 같은 장기자랑 시간이 있었다. 나는 표준어로 된 『심청전』 중에서 한 대목을 전교생 앞에서 낭독했던 기억이 난다. 남자 음악 교사였던 신세균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작사·작곡 과제를 내주기도 했다. 지금으로 치면 창의력 향상 교육인 셈이다. 어릴 때 받은 이런 교육이 내 의식 어딘가에 켜켜이 쌓여있으리라고 생각한다.
황병기<가야금 명인>가야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