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오동 천년, 탄금 50년 3. 학교 대표 독창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1945년 재동국민학교에 다닐 때의 필자 사진. 현재 현대그룹 사옥 자리인 서울 계동의 집에서 찍었다.

내가 재동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 다니던 1940년대엔 KBS가 서울 광화문 쪽에서 들어서는 정동 길의 입구에 있었다. 일본식으로 지어진 아담한 2층 목조 건물이 방송국이었다. 나는 여기서 재동국민학교 대표로 노래를 부른 적이 있다.

 염숙경 선생님이 우리 반 담임이었다. 낙제생에서 갑자기 우등생이 된 4학년생인 나는 염 선생님으로부터 귀여움을 한 몸에 받았다. 우리 국민학교에 있는 세 명의 음악 선생님 가운데 특히 염 선생님이 나를 예뻐하고 내 목소리도 좋아했다. 음악 점수는 항상 100점 가까이 나와 나도 신이 나서 노래를 불렀다. 지금 생각하면 변성기 전의 내 목소리가 요즘식으로 하면 ‘보이 소프라노’가 아니었나 한다.

 염 선생님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내가 부른 노래가 KBS에서 방송됐다. 지금은 작곡가 이름을 잊어버린 이 동요를 내가 초연한 셈이었다. 그 작곡가가 “이 노래는 꼭 재동국민학교 학생이 불러 달라”며 헌정했는데 그 기회가 내게 온 것이다. 멜로디와 가사는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

 “나는 나는 갈 테야. 연못으로 갈 테야. 동그라미 그리러 연못으로 갈 테야”라고 노래하는 곡이었다. 그때는 녹음이나 녹화할 수 있는 장치가 미비했기 때문이었는지 프로그램 진행자와 염 선생님이 방송전 내게 “단 한 번에 끝내야 한다”며 단단히 주의를 줬다. NG 없이 연주를 끝내기 위해 매일 방과 후에 남아 진이 빠질 때까지 연습했다. 공연 당일 방송진행자의 사인이 난 뒤 단 한 번에 노래를 끝내고 칭찬을 받았다. 공개 무대에서 연주한 첫 경험이었다.

 나를 무대에 데뷔시킨 염 선생님은 영화관에도 데리고 갈 정도로 귀여워해 줬다. 옛 국립극장 자리에 있던 명동 시공관에서 상영하던 ‘똘똘이의 모험’을 보러 갔을 때 선생님은 자장면을 사주시기도 했다. 라디오의 어린이 시간대 인기 프로였던 ‘똘똘이의 모험’을 영화로 볼 때의 황홀함은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았다.

 93년 한 방송국에서 찾고 싶은 사람을 한 명 꼽으라고 해 염 선생님을 찾아 달라고 했더니 놀랍게도 바로 만나게 해 줬다. 거의 50년 만에 함께 재동초등학교를 찾아가 선생님의 반주에 맞춰 ‘달맞이’를 다시 불렀다. 재동국민학교 시절 내가 가장 많이 불렀던 노래다. 녹화를 마친 뒤 선생님을 우리 집으로 모셔와 식사를 대접했다. 노인이 된 스승과 제자의 만남이었다.

 어린 내가 꽤 많은 음악적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재동국민학교의 독특한 교육 방식 때문이었다. 당시 그 학교는 예체능 활동에 큰 비중을 뒀었다. 전교생이 과외활동을 하나씩 해야 했다. 월요일 아침에는 간단한 학예회와 같은 장기자랑 시간이 있었다. 나는 표준어로 된 『심청전』 중에서 한 대목을 전교생 앞에서 낭독했던 기억이 난다. 남자 음악 교사였던 신세균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작사·작곡 과제를 내주기도 했다. 지금으로 치면 창의력 향상 교육인 셈이다. 어릴 때 받은 이런 교육이 내 의식 어딘가에 켜켜이 쌓여있으리라고 생각한다.

황병기<가야금 명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