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론을 중국에 처음 들여온 馬一浮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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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호 26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3 자본론을 중국에 처음 들여온 馬一浮

마이후(馬一浮, 1883∼1967)는 철학과 문학에 정통했던 학자이며 시인이고 서예가였다. 외국어도 영어와 프랑스어·독일어·일본어·스페인어·라틴어를 자유롭게 구사했다. 서법과 시(詩)는 유행을 따르지 않았고 속되지 않았다고 한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3>

그는 저장(浙江)성 샤오싱(紹興)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책이라면 닥치는 대로 읽었다. 항저우(杭州)에 황실 장서각인 문란각(文欄閣)이 있었다. 사고전서(四庫全書)가 소장된 곳이었다. 소년 시절 3년간 문란각 인근의 광화사(廣化寺)에 기거하며 사고전서 3만6000여 권을 다 읽었다고 한다. 중국의 전통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지만 서구의 문화와 학술에 관한 호기심도 많았다. 영·불·독어를 익히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했다.

20세 되는 해에 미국으로 갔다. 세인트루이스에 머물며 도서관과 서점을 학교 삼아 아리스토텔레스·헤겔·다윈·단테 등 서구의 사상과 문학에 심취했다. 4년간을 그러다가 독일 문학에 흥미를 느껴 다시 독일로 갔다. 독일에서 『자본론』을 처음 접했다. 그는 저자의 이론과 풍부한 지식, 세련된 문장에 푹 빠져 들었다. 감상하며 탄복하기를 반복했다.

1905년 마는 귀국길에 올랐다. 일본에 한동안 머물렀다. 일본인들도 『자본론』을 모를 때였다. 경쟁이라도 하듯이 그를 찾아와 가르침을 구했다. 일본에선 이때부터 『자본론』이 전파되기 시작했다. 그의 귀국은 “마르크스주의의 중국 전파사”라는 면에서 큰 의의를 갖는 사건이었다.

마이후는 친지와 친구들에게 열정적으로 『자본론』을 소개하고 선전했다. 그러나 읽고 감상하는 데 그쳤을 뿐 번역해서 전파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서구의 선진사상을 소개하기 위해 ‘20세기 번역세계’라는 잡지를 창간해 ‘프랑스 혁명당사’ ‘러시아의 허무주의사’ 같은 글들을 발표했지만 『자본론』에 관해서는 내용의 일부라도 소개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루도 빠짐없이 자본론을 읽으며 경탄하곤 했다.

그는 정치나 사회 문제에는 관심이 없었다. 1912년 1월 난징에 설립된 중화민국 임시정부는 마이후를 교육부 비서장에 임명했다. 1개월 후 “독서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관료가 되려면 또 다른 학문이 필요하다. 나는 소질이 없다”라며 사직했다. 베이징대학 교수직도 거절했다. 20년대 중반 동남지구 5개 성의 통치자인 대군벌이 마이후와 시국담을 나누려 항저우에 왔을 때도 “병이 깊어 완치가 되지 않았다”며 만나기를 거절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에도 그의 학자생활은 변하지 않았다. 초대 상하이 시장이 된 화동군사령관 천이(陳毅)는 군인이었지만 지식인들을 존중했고, 본인도 시인이었다.

천이는 마이후를 방문했다. 마이후는 손님이 온 줄 모르고 잠에 취해 있었다. 그날따라 비가 내렸다. 천이는 몇 시간을 문 앞에 서서 기다렸다. 사람들은 “馬門立雨(마이후의 문전에 서서 비를 맞으며 기다리다)”라며 두 사람을 칭송했다. 이날을 계기로 마와 천은 평생 친구가 되었다.

마이후가 처음 들여와 감상하고 음미하기를 반복하던 『자본론』은 1920년대 말에서 30년대 초에 와서야 젊은 학자들에 의해 소개되기 시작했다. 1930년 최초의 중역본이 나왔지만 원본의 1부 중 1편만 번역한 것이었다. 완역본은 1929년 궈다리(郭大力)와 왕야난(王亞南)이 번역에 착수해 9년 만인 1938년에 출판되었다. 마이후가 독일어 원본을 들여온 지 33년 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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