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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쑥 큰 한국영화 '관객 1000만 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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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석 감독은 지난해 12월 '실미도'개봉을 하루 앞두고 영화사 직원들에게 제안을 하나 했다.

"이번 '실미도'의 흥행스코어가 얼마나 될 지 각자 종이에 적어내라. 이것을 봉투에 담아 봉한 뒤 영화가 극장에서 간판을 모두 내리는 날 열어봐서 가장 가깝게 맞춘 사람에게 별도의 보너스를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곁에 있던 한 직원이 물었다. "감독님은 얼마나 예상하세요?"지체없이 답변이 돌아왔다. "1천만명에 한 명 더 보태서 1천만 1명."


'태극기 휘날리며'가 개봉된 지난 4일 밤, 서울 강남 코엑스의 메가박스 극장에는 젊은 관객들로 가득찼다. 첫 주말 전국에서 2백만명 가까운 관객을 모은 '태극기…'가 1천만명 기록을 세울지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 때까지만 해도 그의 대답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리 흥행을 읽는 후각이 뛰어난 강감독이라 한들 전국 관객 1천만 명이라니 말이 안되는 소리였다. 강감독 특유의 배짱이거나 개봉을 앞두고 '잘 될 거야'라며 스스로 자기 암시를 거는 것 정도로 치부했다. 이후 두 달여가 지난 지금 영화사 직원들은 그의 직감에 또다시 혀를 내두르고 있다. 6일까지 전국에서 '실미도'가 동원한 관객은 9백만명. 다음 주면 1천만명 돌파도 무난해 보이기 때문이다.

편당 관객 1천만명은 꿈의 숫자다. 이 꿈을 한국영화가 현실로 만들었다. 더구나 연타석 홈런까지 내다보고 있다. 지난 4일 밤 개봉한 강제규 감독의 '태극기 휘날리며'(이하 '태극기')의 초반 기세는 '실미도'를 압도하고도 남는다. 8일까지 '태극기'를 본 관객은 약 1백80만명(추정치). 이 추세라면 '실미도'가 걸린 시간을 훨씬 당겨 1천만에 도달하리라는 관측이다.

대체 왜 이럴까. 한국사회에서 다른 분야는 죄다 침체와 부진에서 허덕이는데 왜 유독 한국영화만 기세가 하늘을 찌르는 걸까.

◇영화계의 고속철시대=지난 10년간 한국영화의 성장속도는 현기증이 날 만큼 가팔랐다. 완행열차로 달려가다 고속철도로 옮겨탄 분위기다. 1993년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가 전국 2백20만명으로 흥행신기록을 세우기까지 걸린 시간은 4개월이 넘었다. 그러나 '태극기'는 첫 주말 스코어가 2백만에 육박한다. 일단 극장수에서 비교가 안 된다. '서편제'는 서울에서 단성사를 비롯해 10곳도 안되는 극장에 걸렸다. '태극기'는 서울에서만 1백70개, 전국 4백40개관(총 3만5천석)에 걸렸다. 10년 전은 물론, 5년 전과도 비교가 안 된다.

99년 역시 강제규 감독의 '쉬리'가 전국 관객 6백만명으로 '서편제'의 기록을 깼을 때 '쉬리'의 총제작비는 40여억원이었다. 반면 '태극기'의 총제작비는 1백90억원. 이 중 광고.홍보.이벤트 등에 쓰이는 마케팅 비용이 45억원이다.

◇인프라의 힘=여러 통계가 보여주듯 한국영화산업의 변곡점은 98~99년 무렵이었다. 바로 김대중 정권의 출범과 함께 한국영화는 튼실한 인프라를 갖추기 시작했다. DJ정부는 1천5백억원의 영화진흥기금을 조성해 영화계에 뿌렸다. 금융자본도 이에 화답했다. 98~2002년까지 한국영화에 투자할 목적으로 각종 펀드를 통해 모인 돈은 3천1백억원에 달했다. 외환위기로 온 사회가 휘청거릴 때도 영화계가 건재할 수 있었던 토대였다. CGV.메가박스 같은 멀티플렉스의 증가는 98년 5백개였던 스크린수를 지금은 1천2백여개로 만들어놓았다.

◇컨텐츠와 절묘한 궁합=영화의 질이 받쳐주지 않았다면 관객도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영화계는 지금 젊은 인재들이 들끓는 용광로다. 외국 유학을 마쳤거나 단편영화를 찍으며 연출을 익히거나 직접 현장에서 부딪히며 몸으로 배우는 이들이 넘친다. 오죽하면 한 문화평론가가 "괜찮은 젊은이들이 모두 영화로 빠져나가 문학판이 썰렁할 지경이다. 작가나 평론가조차 영화에 관한 글을 써야 살아남을 정도가 됐다"고 푸념할 정도다. 문자시대에서 영상시대로 급속히 넘어간 것이다.

◇'작은 영화'들의 아우성=그렇다고 그늘이 없는 것은 아니다. 외국영화를 수입해온 한 영화사 대표는 한숨을 푹푹 쉰다. "'실미도''태극기''말죽거리 잔혹사'세 편이 전국 1천2백여개 스크린 중 9백 개를 잡아먹는다. 나머지는 할리우드 영화 차지다."

다른 소규모 영화제작사의 항변도 들린다. "지금 한국영화의 평균제작비는 50억원을 넘는다. 1백50만~2백만명은 잡아야 본전을 건진다는 얘기다. 이거 쉽지 않은 숫자다. 지난해 한국영화의 수익률은 마이너스 10%대였다. 적자를 본 영화사들이 더 많다는 말이다. 몇몇 대박 영화만 보고 영화시장을 속단하면 안 된다. '태극기'처럼 이제 크게 질러 크게 먹자는 할리우드식 마케팅 전략이 더 극성을 부릴 것이다. 중소기업이 튼튼하지 않고서는 나라 경제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듯이 큰 영화 위주로 가면 한국영화산업도 위태로워진다"고 걱정했다. 몇몇 대작의 성공에 취해 샴페인을 터트리기에는 아직 한국영화의 갈 길이 너무 멀다는 얘기다.

이영기.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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