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배명복시시각각

봄을 재촉하는 대홍단호 구출 미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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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미국 해군 함정 푸에블로호가 북한 해군에 나포된 것은 1968년 1월 23일이었다. 전시(戰時)가 아닌 상황에서 미군 함정이 외국군에 나포된 것은 미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푸에블로호가 영해를 침범했으므로 정당한 나포라는 북한의 주장과, 공해상에 있는 외국 함정을 나포한 것은 명백한 군사 도발이라는 미국의 주장이 팽팽히 맞섰다.

미국은 핵 공격도 불사한다는 초강경 대응 방침을 세웠다. 핵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를 원산 앞바다에 출동시켰고, 일본 오키나와에 있던 전투기 360대를 한반도 주변에 배치했다. 그러나 전쟁은 억류된 승무원 82명의 생명 포기를 의미했다. 또 베트남전의 전황(戰況)이 극도로 악화된 상황에서 또 다른 전쟁을 시작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미국은 협상을 택했다. 10개월간의 피 말리는 협상 끝에 미국은 영해 침범을 시인하고 북한에 사과했다. 북한은 승무원 전원을 판문점을 통해 미국에 돌려보냈지만 선체는 돌려주지 않았다. 원산항에 있던 푸에블로호는 대동강으로 옮겨져 ‘미제에 대한 승리’를 상징하는 전리품이 됐다.

그로부터 거의 40년이 지난 2007년 10월 30일, 해적에 붙잡힌 북한 선박을 미국 군함이 구해 주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미 해군 구축함 제임스 윌리엄스호가 아프리카 소말리아 해역에 피랍돼 있던 북한 상선 대홍단호를 구출한 것이다.

국제해사국(IMB)으로부터 구조 요청을 전달받은 바레인 소재 연합해양군 사령부는 미 군함 윌리엄스호에 대홍단호 구출 명령을 내렸다. 윌리엄스호는 즉각 헬기를 사고 현장에 투입하는 한편 50해리를 신속히 기동해 구출 작전에 나섰다. 북한 선원 22명은 미 군함의 접근에 적극 호응해 감춰 뒀던 무기로 해적들을 물리치는 ‘놀라운 용기’를 발휘했다. 미군은 해적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다친 북한 선원들을 응급 처치하고, 중상을 입은 세 명을 윌리엄스호로 옮겨 치료까지 해줬다.

북한 선박은 미 해군의 철저한 감시 대상이다. 예멘 행 무기를 실은 북한 선박을 미 군함이 공해상에서 나포한 일도 있고, 지난해 유엔 안보리의 대북 제재 결의가 통과된 직후 동남아 해역을 운행하던 북한 선박의 행방을 미군이 예의 추적 중이라는 보도도 있었다. 미국이 주도하는 대량살상무기 확산 방지 구상(PSI)의 주요 표적 역시 북한 선박이다. 그런 북한 선박이 미 군함의 도움을 받아 국제적 골칫거리인 소말리아 해적을 물리치는 ‘해상 공동작전’을 펼쳤으니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우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면서 이름을 묻지 않듯 위험에 처한 선원들을 구조하면서 국적을 따지지는 않는다. 대홍단호 구출 사건은 우연히 발생한 미담이 틀림없지만 북·미 관계 변화를 예고하는 좋은 전조가 될 수도 있다.

인도주의적 선행에 입을 다무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어떤 형식으로든 북한은 미국에 사의(謝意)를 표해야 한다. 그것도 말로만 고맙다고 할 것이 아니라 윌리엄스호가 대홍단호를 구해 준 데 대한 답례로 대동강변에 전시돼 있는 푸에블로호를 미국에 돌려주겠다고 하면 어떨까.

북한 핵 문제가 진전을 보이면서 얼어붙었던 북·미 관계에 훈풍이 불고 있다. 영변 핵시설에 대한 불능화 작업이 오늘부터 시작된다. 대홍단호가 구출되던 날, 미국이 제공하는 중유를 실은 선박은 북한에 입항했다. 북한 태권도 시범단이 미국에 들어가 순회공연을 했고, 북한 여자축구 국가대표팀이 미국을 방문해 미국 대표팀과 친선경기를 여는 방안도 추진되고 있다.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평양 공연도 구체화하고 있다.

얼음이 녹으면 봄은 오게 돼 있다. 기회는 왔을 때 잡아야 한다. 이 기회에 북한이 푸에블로호를 미국에 돌려준다면 북·미 관계는 해빙(解氷)의 새로운 전기를 맞을 수 있다. 미 군함의 대홍단호 구출 미담은 북·미 관계의 봄을 알리는 전령(傳令)이 돼야 한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