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까지 붉어진 리안 감독 “격정적 베드신…내게도 힘든 촬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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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출신의 세계적인 감독 리안(53)이 새 영화 ‘색, 계’(色, 戒·사진)의 개봉(11월8일)을 앞두고 한국을 찾았다. 올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은 ‘색, 계’는 그의 농익은 연출력이 만개하는 듯한 작품. 1940년대 상하이를 주무대로 친일 괴뢰정부의 첩보장교 이선생(량차오웨이)과 항일조직의 비밀지령을 받고 그에 접근한 왕치아즈(탕웨이)의 치명적 사랑이 2시간30여분 동안 숨막힐 듯 그려진다. 특히 두 남녀의 격정적인 정사장면은 표현의 수위도, 연출력도 모두 놀라운 수준이다. 기자회견에서 그는 “내가 중년의 위기에 봉착해서 그런지 모른다. 이제까지 해보지 못한 것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답해 좌중을 한바탕 웃겼다. 나중에 따로 만난 인터뷰에서는 문제의 장면을 설명하면서 조금씩 얼굴을 붉히는 것이, 역시나 우리가 알고 있는 리안다웠다.

 -색과 계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

 “불가에서 말하는 인간의 심리상태인데, 영화의 원작인 장아이링의 소설에 아주 잘 표현돼있다. 색(色)은 육체적인 욕망일 수도 있지만 색깔, 즉 눈에 보여지는 것을 말한다. 그 욕망에 속지 않기 위해 계(戒)가 필요하다. 내 개인에게 가장 큰 색(色), 즉 욕망은 영화만들기다. 몸이 마음을 배신하는 경험을 하는 왕차오즈도, 다른 사람들을 두려워하면서도 지배하려고 하는 친일파 이선생도, 냉정함을 유지하는 왕차오즈의 동료 광위민(왕리훙)도 모두 내 자신의 일부다. 이런 온갖 관계 속에서 내 자신의 욕망에 속지 않게 감시하는 제3의 눈이 있다면, 그게 내 계(戒)다.”

 -량차오웨이의 연기가 대단하다.

 “오래 전부터 꼭 함께 일하고 싶었다. 섬세한 감성과 표현력이 모든 감독이 꿈꾸는 배우다. 이번 영화에서는 전에 한번도 보여주지 않은 모습을 주문했다. (홍콩출신인 그가) 영화 전체를 만다린어로 연기한 것도, 악역도, 중년남자역할도 다 새로운 도전이었다. 특히 친일 반역자가 지닌 두려움을 너무도 잘 표현했다. 이전의 량차오웨이 같은 모습은 딱 한 번, 클라이막스에서만 주문했다. 어떤 여자도 반할 수밖에 없는 눈빛 말이다.”

 -동성애를 다룬 ‘브로크백 마운틴’도, 이번 영화도 두 주인공의 첫 정사장면이 퍽 폭력적이다.

 “두 영화 모두 사회적으로 금지된 사랑을 다룬다. 금지의 강도가 셀수록, 그 사랑은 더욱 격정적이 된다. 주인공 모두 자기 억압, 자기 모멸을 느끼는 사람들이다. 다만 ‘브로크백 마운틴’이 그 사랑을 순수한 천국처럼 그렸다면, ‘색, 계’는 지독히 현실적인 지옥이다. 내게 두 영화는 자매편 같은 작품이다.”

 -두 영화에서 연달아 육체를 통해 소통하는 극한적 사랑을 그렸는데.

 “내 자신의 자연스러운 변화 같다. 밖에서 보는 나는 수줍고, 소극적인 사람이지만 그런 내 모습의 투영은 ‘센스 앤 센서빌리티’(1995년작)까지만이다. 이후로는 내 자신의 모습을 양파껍질 벗듯 벗기 시작했다. 껍질을 벗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이 영화를 찍으면서 극단적인 감정에 몰입하는 것이 고통스러워서 누가 나한테 그만하라고 신호를 보내줬으면 싶었다. 나는 영화를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정직할 수 있는 용기와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라고 본다. 그런데 지금은 미치지 않고 자신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웃음)”

 -정사장면들에서 배우들의 동작과 자세를 세밀하게 지시했다고 하던데.

 “(얼굴을 점점 붉히며) 내 도덕관념과 숫기없음을 제쳐둬야 하는 힘든 장면이었다. 관객들에게 그 뒤틀린 사랑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장면을 생각했다.”
 

글=이후남 기자, 사진=양영석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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