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정치·나가시마가 만든 ‘불멸의 神話’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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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호 06면

‘미스터 프로야구’로 불린 나가시마의 은퇴식 장면. 나가시마는 “우리 자이언츠는 영원히 불멸입니다”고 말했다(왼쪽). 오 사다하루가 1977년 9월 3일 도쿄 고라쿠엔 구장에서 열린 야쿠르트전에서 세계 신기록인 통산 756호 홈런을 치고 있는 모습.지지통신사 제공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직후의 일본은 하루 먹거리를 미군 원조물자에 의존해야 할 정도로 궁핍했다. 폐허를 딛고 가까스로 일어서던 일본인들이 처음 열광한 대상은 역도산(力道山)의 프로레슬링이었다. ‘리키도잔’이란 링네임의 일본인으로 알려졌던 역도산이 덩치 큰 백인 레슬러를 내다 꽂으면 승전국 미국에 주눅들어 있던 일본인의 스트레스도 한꺼번에 날아갔다.

일본시리즈 9連覇(1965~73년)

역도산의 급사(1963년)와 함께 프로레슬링의 인기가 시들해질 무렵, 그 자리를 메운 것이 프로야구였다. 일본이 고도성장의 시대를 질주하던 무렵이었다. 오늘날 경제대국 일본의 밑거름이 된 당시의 고도성장기는 요미우리의 전성기와 정확히 일치했다.

1973년 11월 1일 역사적인 일본시리즈 9연패를 달성한 자이언츠의 가와카미 감독(가운데)과 나가시마 선수(뒤 왼쪽) 등이 고라쿠엔 구장을 돌고 있다. 요미우리신문사 제공

일본 야구사에 길이 남을 대기록, 일본시리즈 9연패(V9·1965~73년)도 바로 이 시기였다. 일본 경제의 일취월장은 요미우리의 승승장구와 닮은꼴이었다. 고도성장을 떠받친 일벌레 회사원들은 돈과 명예를 거머쥔 요미우리의 스타들에게서 자신들의 미래상을 엿보았다.

‘V9 신화’는 불세출의 두 스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나가시마 시게오(長嶋茂雄)와 오 사다하루(王貞治·왕정치). 두 사람의 영문 이니셜을 딴 ON은 요미우리, 아니 일본 경제 성공신화의 대명사였다.

나가시마의 타격모습

대만계 왕정치는 메이저리거 행크 에런의 기록을 깬 외다리 타법의 홈런왕(통산 868개)으로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일본에서의 위상은 나가시마가 한 수 위다. 그는 현역 17년 동안 매년 베스트 나인에 뽑혔고 리그 MVP를 다섯 차례 차지하면서 ‘미스터 프로야구’란 별명을 얻었다. 국제대회에 나가는 일본대표팀(드림팀)의 감독이 된 것도, 친정 요미우리의 사령탑 자리도 나가시마가 먼저였다.

3루수 나가시마와 1루수 오가 요미우리에서 한솥밥을 먹게 된 것은 58년이었다. 그해 초 입단한 나가시마는 홈런왕·타점왕을 휩쓸고 신인왕까지 차지하는 맹활약을 펼쳤다. 하지만 그도 데뷔전에서는 4타석 삼진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해 시즌이 끝나갈 무렵 와세다실고 3년생인 까까머리 오가 입단 계약을 맺고 거인군에 합류했다.

36년생으로 릿쿄(立敎)대를 졸업한 나가시마가 네 살 위였지만 오가 고교 졸업 후 프로로 직행하는 바람에 입단은 한 해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이듬해 6월 25일 일본 야구사에 길이 남을 경기가 고라쿠엔 구장(현재 도쿄돔 자리)에서 열렸다. 일본 야구사상 첫 ‘천람시합’. 천람(天覽)이란 일왕 부처가 관람한다는 뜻이다. 최고의 귀빈관중을 모시고 한신 타이거스와 맞붙은 이날 경기에서 오는 7회 말 동점 투런 홈런을 날렸다. 절정은 9회 말 투아웃에 나왔다. 아슬아슬 파울선을 범할 듯 말듯 왼쪽 펜스를 넘어간 나가시마의 굿바이 홈런이었다. 나가시마는 훗날 “프로야구가 마이너(비주류)에서 메이저(주류)가 된 날”이라고 회고했다.

나가시마와 왕정치의 쌍포를 일본 언론들은 ‘아베크 홈런’이라 명명했다. 이날 천람시합에서 처음 터진 ON의 아베크 홈런은 나가시마가 은퇴한 74년까지 통산 106경기에서 작렬했다.

71년 한큐와 맞붙은 일본시리즈 3차전도 명승부로 기록된다. 9회 말 2사 1루, 0대1로 완봉패 직전의 상황에서 3번 나가시마의 타순이 돌아왔다. 그의 타구는 2루수와 유격수 사이를 꿰뚫었다. 뒤이어 터진 4번 오의 굿바이 스리런. 환상의 콤비 ON은 그렇게 V9 신화를 만들어 나갔다.

두 사람은 한때 감독·선수의 관계가 되기도 했다. 74년 먼저 현역을 은퇴한 나가시마가 곧바로 감독으로 취임했기 때문이다. 오는 나가시마 감독 휘하이던 77년 756호 홈런을 터뜨리며 생애 통산 최다홈런 세계기록 보유자가 됐다. 그는 80년까지 현역으로 뛰었고 84년에 거인군의 지휘봉을 물려받았다.

두 사람이 직접 맞붙은 것은 2000년 시즌이 유일하다. 거인의 감독으로 복귀해 있던 나가시마와 다이에 호크스의 감독으로 옮긴 오가 각각 소속 리그를 제패하고 일본시리즈에서 격돌했다. 운명의 여신은 나가시마의 손을 들어주었다(4승 2패).

그 이후 나가시마는 2002년 아테네 올림픽 대표팀 사령탑이 됐으나 출전도 못해보고 뇌경색으로 쓰러진 뒤 활동이 뜸했다. 반면 오는 지난해 3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일본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해 7월에는 위암 수술을 받았으나 곧 소프트뱅크 감독직에 복귀하는 투혼을 발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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