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카포네의 빛나는 아이디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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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호 31면

힙 플라스크(HIP FLASK), 포켓 위스키, 휴대용 술병. 똑같은 물건을 지칭하는 세 가지 표현이다. 뒷주머니에 넣는 납작한 휴대용 술병, 이 놀라운 발명품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마피아의 대부 알 카포네의 작품이다. 금주령이 내려졌던 1920년대의 미국에서 가장 짭짤했던 밀주 제조 사업을 하지 않았다면 알 카포네가 아니다. 이때 FBI의 단속망을 피하기 위해 만든 아이디어가 바로 포켓 위스키 병이다.

윤광준의 생활 명품 이야기-키커랜드 휴대용 술병

바지 주머니에 넣을 수 있도록 넓적하게 안쪽으로 둥글린 금속제 술병. 역시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가 맞다. 술병처럼 보이지 않는 포켓 위스키 병, 절박한 필요가 만들어낸 참신한 발명품임을 부정하지 못한다. 알 카포네는 마피아 두목을 하지 않았더라도 창의적 사고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역량 넘치는 CEO라고 할까.

나도 알 카포네의 혜택을 누리며 사는 사람이다. 두주불사형 인간의 활동반경 때문이다. 난 전 세계 어디라도 일터로 삼아야 하는 프리랜서다. 혹한의 티베트 고원이나 몽골의 고비사막, 거센 바닷바람이 몰아치는 홋카이도의 나홋카에서 술 없이 견디기는 힘들다. 언제 어디서라도 추위를 녹여주고 외로움마저 달래주는 술. 상황마다 주종은 바뀔지언정 가방 한쪽에 넣어둔 휴대용 술병은 든든한 작업의 파트너가 되었다.

술 때문에 일어난 에피소드 가운데 압권은 파키스탄에서였다. 무슬림 국가에선 술을 마시지 못한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 어렵게 술 파는 곳을 찾아냈다. 술을 달라는 내게 웨이터는 시험지만한 종이를 들고 왔다. 술을 마셔야 하는 이유와 직계 3대까지 조상의 이름을 적어내라는 것이다. 기가 막혔지만 난 장문의 반성문을 제출한 후에야 500㎖짜리 조악한 위스키 한 병을 마실 수 있었다. 문화의 차이는 때론 치욕을 감수해야 하는 사건으로 발전한다.

인간은 체험으로 성장하는 법이다. 이후 무슬림 국가를 찾을 땐 반드시 포켓 위스키 병에 술을 담아간다. 이 사건으로 찾아낸 물건이 바로 미국 키커랜드의 18온스(약 500㎖) 포켓 위스키 병이다. 몇 잔 분량의 작은 병에 담긴 술에 감질나던 내게 두세 사람이 마실 만큼 넉넉한 용량을 가진 이 휴대용 술병이 주는 포만감은 대단했다. 한 번 당한 일을 두 번 다시 반복한다면 실패의 교훈은 내것이 아니다.

키커랜드의 포켓 위스키 병은 알 카포네가 만든 클래시컬한 원형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다. 여기에 반짝이는 스테인리스 재질로 만든 견고함과 빈틈없는 마개의 밀봉 성능을 더했다. 큼직한 청바지 뒷주머니에 넣으면 엉덩이의 굴곡에 감기듯 밀착되는 촉감도 괜찮다.

여행지에서 추위를 녹이는 방법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옆 사람의 손을 잡는 것, 둘째는 죽어라 뛰어다니는 것, 셋째는 독한 술을 마시는 방법이다. 난 첫째와 셋째 방법을 함께할 때 제일 행복하다.


윤광준씨는 사진가이자 오디오평론가로 활동하면서 체험과 취향에 관한 지식을 새로운 스타일의 예술 에세이로 바꿔 이름난 명품 마니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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