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그 때 그 사람] ‘사격요정’ 부활 꿈꾸며 베이징행 ‘담금질’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월간중앙메달 불모지였던 사격에서, 그것도 18세의 어린 나이에 올림픽 은메달을 거머쥔 앳된 외모의 소녀. 그로부터 7년. 이제는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조차 전해지지 않는다. 점차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져 가는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가늠자를 통해 보는 세상이 전부였던 열일곱 살. 세상은 여린 외모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서운 그의 눈빛에 열광했고 0.2점 차의 패배에 탄식했다. 아깝게 은메달에 머물렀지만 시상대 위에서 그는 누구보다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귀국 후 출연한 TV 프로그램에서는 “2등 하는 것도 어디 쉽나요? 1등 못했다고 고개 푹 숙이고 죄인처럼 보이는 것이 싫었어요”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100일 동안은 TV·라디오·신문·잡지 등에 끌려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은메달의 영광은 어린 소녀에게 많은 것을 주었고 또 많은 것을 앗아갔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의 영광 이후 각종 대회에서의 부진은 7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이어졌다. 오랜 슬럼프에 수만 명에 이르던 팬도 수십 명으로 줄어들어 이제는 친구가 됐다. 그들은 지금도 대회 때면 사격장까지 찾아와 응원한다.

강초현, 누구인가?

2000년 시드니올림픽 사격 여자 공기소총 부문에서 예상치 못했던 메달 소식이 들려왔다. 당시 18세의 나이로 은메달을 따낸 뒤 국민과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일약 스포츠 스타로 떠오른 강초현. ‘초롱이’ ‘사격요정’ 등의 수식어가 그를 따랐다. 그러나 이후 저조한 성적과 주위의 지나친 관심에 따른 심리적 부담감을 극복하지 못해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대표 선발전에서 1점 차로 아쉽게 탈락하는 등 부진을 거듭해 왔다.

그 동안 올림픽 출전 당시 재학 중이던 유성여고를 졸업했고(2001년) 고려대 체육교육학과에 입학했다. 같은 해 막 창단한 갤러리아사격단의 창단멤버가 됐다. 이제는 어느새 팀의 맏언니. 교복을 벗은 지 얼마 안 된 후배들도 잘 다독이고 감독님과 호흡도 잘 맞는다고 한다.

한 차례의 사랑도 겪었다. 대학 시절 캠퍼스 커플이었으나 지난해 초 헤어졌다고 한다. 지금은 남자친구가 없다.

대학 3학년이던 2004년. 158cm, 45kg의 체격으로 10kg에 달하는 사격복을 입고 매일 4시간씩 사격장에서 비지땀을 흘렸다. 그러나 아테네올림픽에는 출전하지 못했다. 2003년 자그레브월드컵 때는 여자 10m 공기소총 올림픽 쿼터를 획득하면서 기대를 모았지만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안타깝게 탈락했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때도 태극마크를 달지 못했다.

“부담감 때문이었어요. 시드니 때는 감독님이 시키니 아무 생각 없이 쐈고, 그래서 은메달도 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사심 없이 총과 나와 과녁만 있었던 거죠. 지금은 그게 안 돼요. 경기·메달, 그리고 그 뒤의 수순들…. 생각이 너무 많아졌어요. 당장 금메달과 은메달 사이에 연금 차이만 해도 어디인데요? 이제부터 저도 마음을 비우고 부담 갖지 않으려고 해요. 초심으로 돌아가는 거죠.”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는 MBC 올림픽 중계 사격종목 해설을 맡아 총 대신 마이크를 잡기도 했다.

그가 사격을 시작한 것은 대전 유성중 시절. 총을 잡은 선배들이 멋져 보인 데다 친척 오빠인 강재규 유성여중·고 감독의 권유로 사격과 인연을 맺었다. 공부를 시키고 싶어했던 부모님을 설득하는 데만 한 달이 걸렸다.

총 한 대에 300만 원이 훌쩍 넘는 사격 장비도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두 다리를 잃은 아버지의 월 10여 만 원의 연금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강 감독이 박봉을 쪼개 뒷바라지했다. 그리고 1999년, 그의 아버지는 딸이 쏜 만점 표적지를 머리맡에 둔 채 세상을 떠났다.

홀어머니와 함께 사는 강초현은 현재 소속팀인 갤러리아에서 연봉 3,000만 원을 버는 가장이다. 2003년 여름에는 스스로 번 돈으로 28평짜리 아파트를 샀다. 그의 꿈은 “결혼해서 아이를 다섯 명쯤 낳는 것”이다.

베이징올림픽에 마지막 승부수

걱정이라면 올해 열심히 한 것에 비해 성적이 좋지 않다는 것뿐이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사격을 그만두려고 한 적은 없다. ‘2000년 한때 잘나가던 사격요정’으로 남기는 싫었기 때문이다. 잊혀진다는 것에 대해서도 서운한 마음은 없다. 그는 아직도 기억해 주는 사람들이 있어 힘이 난다고도 했다.

강초현은 올림픽에 ‘한이 맺힌’ 선수다. 마지막 한 발에서 금메달이 은빛으로 바뀌었으니 그럴 만하다. 그래서 내년 베이징올림픽에 마지막 승부를 걸 생각이다.

“내년까지 정말 열심히 해 보고, 그 이후에는 공부 쪽에 주력하려고 해요. 대학원 진학이나 어학연수 같은 거요. 회사나 감독님도 공부하는 것은 좋다고 했거든요. 물론 사격은 계속할 것입니다. 정말 매력적인 스포츠예요. 하면 할수록 어렵기는 하지만….”

‘사격요정’이라는 별명 대신 ‘연습벌레’로 거듭나면서 부활의 신호탄을 쏘고 있는 강초현. 그는 올림픽 금메달에 대한 꿈을 꾸며 오늘도 표적 앞에 선다.

매거진 기사 더 많이 보기

▶[J-HOT] 연·고大 'CEO형 총장' 한 해 1000억씩 모금

▶[J-HOT] 'SIN' 'BUM'등 여권 영문이름 무심코썼다 낭패

▶[J-HOT] 숨막히는 샷 순간에 "따르릉" "여보세요" 라니…

▶[J-HOT] 정인봉 "결정하시라" 하자 昌 "고민해 볼게"

▶[J-HOT] 文후보, 노대통령 "검증 거친분아니다" 발언에 "아, …"

▶[J-HOT] 전북대학교 '복부인' "일냈다"

▶[J-HOT] [곽대희칼럼] 교수님 부인이 잠 못드는 이유는

▶[J-HOT] 코앞에 닥친 화마피해 '집 수영장'서 3시간 잠수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