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할말은하자>19.파출소 가기 여전히 겁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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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同名異人이라는 이유로 경찰에 의해 폭력범으로 몰려 벌금이 나오자 정식재판을 신청,2년7개월만에 무죄선고를 받은 李燦秀씨(36.경기도파주군법원읍)는 용기있는 시민이다.폭력사건으로 불구속된 범인이 경찰에서 李씨의 이름.생년월일.주소등 을 가짜로 대고 석방되는 바람에 91년 12월 자신이 전과자가 돼있고 벌금 20만원까지 물어야 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된 李씨는 법정 소송을 걸어 지문대조 끝에 결국 무죄가 입증됐다.
그 과정에서 李씨가 겪은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다.상수도사업소 공무원이었던 그는 엉뚱한 전과자가 되는 바람에 직장까지 사직해야 했다.
주변에선 李씨에게『명백한 경찰의 잘못이므로 그동안 받은 물질적.정신적 피해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을 내라』고 하지만 아예 단념한 상태다.경찰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무죄판결 받을 때까지의 고통이야 말로 해서 뭘합니까.직장까지 때려치우고.하지만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내면 괜히 경찰의 미움을 사 퇴직후 차린 레스토랑에 피해가 생길까봐 겁이 나요.식품위생법의 그 까다로운 조항들을 들고나오면 배겨낼 업주가 어디 있겠습니까.』 李씨는『힘없는 서민은 무죄를 입증했다는 사실 하나에 만족해야 한다』며『말로야 시민의 지팡이지만 일반 시민이나특히 구멍가게라도 하는 사람들이 경찰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두려움』이라고 말한다.
무엇이 李씨를 이처럼 나약한 시민으로 만들었을까.문민시대라고하는데도 불구하고 지나간 독재정권 시절로 李씨를 되돌려 놓은 것은 무엇일까.
아무리 문민시대가 됐고 경찰 스스로『시민의 경찰,봉사하는 경찰로 거듭나겠다』고 다짐하고 있지만 일반 시민은 너나없이 경찰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을 갖고있다.
全大連 YMCA회장은 이에 대해『일제시대와 독재정권아래 권력기관으로서 경찰이 저질러온 각종 권위주의적.폭압적 태도들이 많이 사라지긴 했지만 아직도 온존하는 부분이 많고 국민의 의식에는「경찰=두렵다」는 생각이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라고진단하기도 한다.
일상화 되다시피한 피의자에 대한 반말,인신모독성 폭언,「당신이 범인이고 잘못했다」는 식으로 몰아가는 분위기,철야수사….
경찰관서에 한번이라도 가본 적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느끼는고질화된 경찰의 관행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고 이 시대의 경찰은 여전히 서민들에게 넘을 수 없는「난공불락의 요새」다.
〈申成湜기자〉 수배중인 용의자의 동생을 26시간이나 파출소에감금.폭행한 일,무혐의 처리된 사기사건의 수배를 해제하지 않아불심검문에 걸린 시민을 12시간 구금.폭행한 사건,친구의 오토바이를 빌린 10대를 도둑으로 몬 일등은 언론에 알려져 말썽 이 된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경찰 스스로 시민에 대한 군림을 당연스레 여기는 태도가 몸에 배 있다는 것이다.
회사원 崔모씨(51)는『얼마전 도로에 잠시 차를 세우고 물건을 사가지고 나오다 순찰차를 탄 새파랗게 젊은 경찰관이 마이크로「당신은 양심에 털도 없느냐」며 핀잔을 줘 망신당했다』며『그렇게 함부로 말해도 되는지,순간적으로 화가 났지만 상대방이 경찰이라는 생각이 들자 주눅이 들어 참고 말았다』고 말했다.
D경찰서에 고소장을 접수시킨 李모씨(56.여.상업)는 하루전날 약속을 한뒤 담당경찰을 찾아갔지만 한나절을 기다린뒤『오늘 바쁘니 내일오라』는 말만 듣고 돌아와야 했다.
李씨는 하루종일 장사도 못한 것이 속상하고 분했지만 담당형사는『그 정도가 뭐 대수냐』는 태도였고 李씨는 칼자루를 쥐고있는경찰관의 비위를 거스를까 벙어리 냉가슴만 앓아야 했다.
그렇다면 올바른 시민.경찰관계를 정립시킬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일까.경 찰들의「몸에 밴」권위주의 태도를 「봉사하는」자세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경찰들 스스로 환골탈태하려는 노력도 중요하겠지만 더욱 중요한것은 시민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적극 주장하고 경찰관에 대해 할말은 해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사회국장 金景男목사는『약하면 약할수록 더욱 얕보게 되는게 권력의 속성』이라며『내 권리는 내가 지키겠다는 생각으로 경찰의 각종 부당한 대우.말투.태도등에 대해그 자리에서 지적해야 한다』고 말한다.
『당신의 태도는 부당하다』『당신의 상관에게 항의하겠다』는 식으로 시민으로서의 당연한 권리를 내세우고,경찰관에게도 할말은 해야 한다는 것이다.이제 더이상 경찰제복은 권력의 상징도,막연한 두려움의 대상도 아니다.막힌 말문을 열 권리와 의무는 다름아닌 시민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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