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기술 유출' 칸 사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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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베즈 무샤라프 파키스탄 대통령은 5일 핵무기 제조 기술을 북한과 이란.리비아 등에 유출한 혐의로 수사를 받아온 압둘 카디르 칸 박사를 사면한다고 밝혔다. 무샤라프 대통령의 사면 결정에 따라 핵기술 유출은 파키스탄 정부와는 무관한 칸 박사 등 과학자들의 '개인적' 차원의 범죄로 매듭지어질 전망이다.

무샤라프 대통령은 이날 오후 기자회견을 열고 "칸 박사 본인의 요청과 내각의 권고를 받아들여 그를 사면한다"고 발표했다. 무샤라프 대통령은 또 "파키스탄 정부는 파키스탄의 핵 개발과 관련한 어떠한 서류도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제출하지 않을 것이며 유엔의 조사도 허용치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그는 "이들 기구가 파키스탄을 방문해 협의하는 것은 환영한다"고 밝혔다.

이에 앞서 칸 박사는 지난 4일 무샤라프 대통령을 면담한 뒤 텔레비전 연설을 통해 직접 핵 유출 혐의를 시인하고 사면을 호소했다.

무샤라프 대통령은 한때 '국가의 적'이란 용어까지 사용하며 강하게 칸 박사를 비판해 왔다. 그런 그가 갑작스레 입장을 바꾼 데는 칸 박사를 기소할 경우 재판 과정을 통해 정부와 군의 고위 관계자들의 개입사실이 드러날지 모르는 위험부담을 덜기 위한 속셈이 숨어 있다는 게 현지 정보기관 관리들의 설명이다.

칸 박사가 국영 방송에 출연해 사면을 호소하면서 "북한과 리비아.이란 등에 핵기술을 유출한 것은 모두 내가 주도한 것"이라고 강조한 뒤 "정부로부터 어떠한 종류의 허가도 없었음을 분명히 하고 싶다"고 말한 것도 이 같은 분석을 뒷받침한다.

이와 함께 무샤라프 대통령이 파키스탄이 핵무기 개발에 성공한 이래 국민적 영웅으로 떠받들어져 온 칸 박사를 처벌할 경우 발생할 국내 여론 악화를 우려한 것도 사면 결정의 또 다른 이유로 해석된다. 무샤라프 대통령은 사면을 발표하면서 "파키스탄의 국익과 핵 유출 경위를 알고자 하는 국제적인 요구 사이에 균형을 찾으려 했다"며 고심한 흔적을 드러냈다.

파키스탄 정부의 사면 결정이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에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주목된다. 미국은 핵기술 유출 재발을 막기 위해 6천여명에 이르는 파키스탄 내 핵 관련 종사자에 대한 전면적인 내사를 벌이는 한편 핵 관련 시설에 대한 감시장치를 만들 것으로 알려졌다. 모하메드 엘바라데이 IAEA 사무총장은 "칸 박사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며 핵 유출 경위에 대해 계속 추적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파키스탄 정부는 칸 박사를 보호하고 자국의 핵개발 정보 유출을 막으려는 입장이어서 양국 간에 마찰이 예상된다.

예영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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