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사랑 아디' 히틀러 정부 에바 브라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수백만명의 유대인을 사지로 몰아넣었던 나치독일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의 최후를 얘기할 때마다 빠지지 않는 여인이 에바 브라운이다. 소련군의 침공으로 더 이상 희망이 없던 45년 4월 30일 히틀러는 총통 관저 지하 벙커에서 '귀여운 에바'와 결혼식을 올리고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곧이어 에바도 음독을 함으로써 '내 사랑 아디'의 뒤를 따른다.

히틀러의 비서이자 정부, 아내였던 에바는 1912년 오늘(2월6일) 뮌헨이 중산가정에서 태어났다. 도시로 상경하는 다른 아가씨들과 함께 영화계 진출을 꿈꾸며 베를린으로 올라온 에바는 히틀러의 전속 사진사였던 하인리히 호프만의 조수로 일하다가 1929년에 히틀러를 처음 만났다.

히틀러가 일생을 통해 사랑한 오로지 한 여성으로 알려진 질녀 게리 라우발의 자살 후 에바는 히틀러의 연인이 되었고, 1936년 히틀러의 처소로 들어가면서 그의 안주인으로 살아가기 시작했다.

에바는 당시 독일과 히틀러가 이상적 여성미로 간주한 단순성, 유순, 겸허, 그리고 맹목적인 헌신 등의 미덕 를 두루 갖춘 인물이었다. 미인이었으나 활기가 없고 내성적이었던 그녀의 성격은 히틀러와의 관계나 총통관저의 비밀을 지키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두 사람은 공공장소에 함께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거의 없었으며 대다수의 독일인들은 그녀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다고 한다.

히틀러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그녀가 남긴 일기와 몇편의 편지에 담겨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저는 당신을 어디든 따라갈 것이라 맹세했습니다. 죽음까지도요. 저는 오직 당신의 사랑 때문에 살아갑니다." "그를 잃는 것보다는 1만명의 다른 사람이 죽는 것이 독일을 위해서도 좋아."

러시아 군대가 베를린으로 진격해 오던 '45년 4월 그녀는 총통 벙커에 있던 히틀러와 합류했다.

45년 4월 29일 히틀러의 지하사령부에서 최후의 48시간의 회의 끝에 더이상 저항은 불가능한 것으로 결론이 나고, 이미 베를린에 입성한 소련군에 대한, 독일군의 최후의 저항의 총소리도 멎었다. 이날 히틀러와 에바는 지역판사의 주관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다음날 히틀러와 신부의 방에서 권총소리가 났다. 이것이 두 사람의 최후였다. 에바와 청산가리 알약을 나눠먹은 히틀러는 권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쏘았고, 독약이 몸에 퍼지며 에바도 그와 운명을 같이했다. 때는 4월30일 오후 3시30분.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