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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대 대선 역사 대권 3수(修)생 누가 있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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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대선 낙마, 2002년 민주당 경선탈락 등 두 번의 실패 이후 올해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 티켓’을 거머쥔 이인제(52) 후보가 정가에서 화제다. 17대 대선은 이 후보에게 세 번째 대권 도전이다. 정치 역정 20년간 일곱 차례나 당적을 바꾸는 진기록을 세우며 민주당에 정착한 그가 정치적 명예회복과 재기에 성공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이 후보는 ‘지식강국, 문화대국, 위대한 통일조국 건설’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범여권 후보단일화의 우위를 점하기 위해 “민주개혁세력의 본산인 민주당 후보가 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3수생의 저력=‘대권 3수’의 공력(功力)은 민노당 권영길(66) 후보에게도 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역대선거정보 분석 결과, 권영길 민노당 대선 후보는 3번 모두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정통 3수생이다. 제15~17대에 연속 도전한 타이틀도 가지고 있다. 15대 대선에서는 ‘국민승리 21’ 후보로 나와 김대중(새천년민주당), 이회창(신한국당), 이인제(국민신당) 후보에 이어 30만 6026표를 얻어 1.2%의 지지도를 얻었다. 제16대 대선에서는 노무현(민주당), 이회창(한나라당) 후보에 이어 95만 7148표를 얻어 3.9%를 기록했다. 15대 때와 비교해 3배가량 지지율이 늘었지만 청와대 입성에는 별 도움을 주지 못했다.

◇4수째 도전 성공한 DJ=헌정 이후 일곱 번 간접선거와 아홉 번 직접선거를 치루면서 가장 많이 대권에 도전한 후보는 김대중(81) 전 대통령이다. 1987년, 16년 만에 부활한 대통령 직접 선거에 출마해 노태우(36.6%)ㆍ김영삼(28%) 후보의 뒤를 이어 27%로 3위를 기록했다. 이어 도전한 제14대 대선에서는 정치적 라이벌 김영삼(42%) 후보에게 10%P 차로 또 한번 고배를 마셨다. 제15대 대선.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도전한 그는 이회창 후보가 38.7%로 뒤를 바짝 추격했지만 40.3%의 득표율을 기록해 꿈에 그리던 청와대에 입성했다. 서부벨트(호남+충청)를 그러모은 그는 ‘마음내키는 대로 좇아도 법도를 넘지 않는다’는 종심(從心)의 나이로 ‘용상’에 오르게 된 것이다. 이에 앞서 김 전 대통령은 1971년 제7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시 현직 대통령이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도전장을 내밀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공화당의 박정희와 신민당의 김대중 양자대결의 박빙으로 전개됐으나 박 대통령이 얻은 득표수 6034만 2828표에 비해 1000만여표 적은 5039만 5900표를 얻어 쓰라린 패배를 맛봤었다.

◇재수생군(群)=이회창(72) 후보는 제15~16대 대선에 출마했지만 모두 2등으로 대통령 꿈을 접어야 했던 뼈아픈 사연이 있다. 1996년 여당의 차기 대권 주자로 신한국당에 입당한 후 97년 제15대 대통령 후보에 선출됐다. 그러나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탈락한 이인제 후보가 탈당, 국민신당을 결성했고 이에 대적하기 위해 민주당과 통합, 신한국당을 한나라당으로 바꿔 나섰으나 새정치국민회의의 김대중 후보에게 패배했다. 40.3%의 득표율을 기록한 김대중 후보는 1.6%P 뒤진 이 후보에게 신승했다. 2002년 제16대 대선에 다시 도전, 강력한 대선 후보로 자리매김을 했지만 막판 3풍(風)을 이기지 못하고 노무현(48.9%) 후보에게 2.3%P 뒤진 46.6%를 기록,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김영삼(80) 전 대통령은 공식적으로는 두 번째 대선 도전으로 ‘수장’ 자리에 올랐지만 20년 전 당내 경선에서 김대중 후보에게 밀린 쓰라림이 있다. 어찌보면 3수 끝에 대통령이 된 또 한 명의 인물이다. ‘한국 최초의 경선’으로 불리는 71년 DJ-YS 경선. 박정희 3선(選)을 저지하기 위한 신민당 대통령후보 지명전에 ‘40대 기수론’을 내걸고 김영삼이 먼저 도전했지만 차기 당수 자리를 보장받은 이철승 계(系)의 막후 지원으로 김대중 후보가 결국 승리해 박정희 전 대통령과 맞붙었다.

이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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