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경제] 이마트에서 떠올린 ‘그의 얼굴’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2호 20면

19일 밤 서울 강서구 가양동의 이마트. 1층 매장에서 냉장고용 밀폐용기를 집었다. 이마트가 자체 상표(PL)로 내놓은 1.1L짜리 사각 용기였다. 값은 2600원. 바닥을 보니 납품업체는 L사였다. 그런데 옆 코너엔 L사가 만든 자체 브랜드 용기도 있었다. 조금 고급스럽긴 했지만 같은 부피였는데 5100원 딱지가 붙었다. 사람들의 손은 당연히 더 싼 곳을 향했다.

다음은 식품 칸. 해물완자 봉투를 집었더니 900g짜리 PL 상품이 5000원대였다. 바로 옆의 다른 브랜드는 비슷한 가격인데도 양이 600g뿐이었다. 역시 싼 게 인기였다.
매장을 돌면서 갑자기 권오승 공정거래위원장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사흘 전 상황이 떠올랐다. 이마트가 ‘가격 파괴’를 선언하며 20~40% 저렴한 PL 상품 3000개를 내놓은 뒤였다. 권 위원장은 즉시 견제구를 던졌다. “물건을 싸게 팔면 소비자에겐 좋다. 그러나 부담이 제조업체에 전가될까 걱정된다.” 소비자 후생보다 중소 납품업체의 수익 쪽에 무게를 두는 얘기였다.

권 위원장이 취임한 지난해 이후로 묘하게도 10~11월만 되면 공정위가 시끄럽다. 그래서 공정위의 ‘가을 징크스’라는 얘기까지 나온다.

지난해 10월엔 출자총액제한제도 논란으로 재계가 벌집 쑤셔놓은 듯했다. 적은 지분으로 계열사를 장악하지 못하게 한다며, 권 위원장이 ‘환상형 순환출자’를 금지하겠다고 선전포고했기 때문이다.

올가을 들어서도 그가 전선(戰線)을 확대한 건 이마트뿐이 아니었다. 공룡 기업들도 타깃이었다. 공정거래법 시행령을 바꿔 ‘시장지배적 기업이 원가보다 과도한 이윤을 붙였다면 직접 제재하겠다’고 고집을 굽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화들짝 놀란 재계가 강력히 반대했는데도 말이다.

결국 규제개혁위원회가 직접 가격규제는 바람직하지 않다며 퇴짜를 놓았다. 권 위원장
도 톡톡히 망신을 당했다.

사석에서 만나본 권 위원장은 학자 출신다운 소신과 신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와의 대화에서 들은 얘기 한 토막이 그렇다. “중견기업 H사 사장을 만났는데 ‘국내에선 중견기업이 대기업으로 큰 예가 없다’고 하더라. 맞다. 이 구조로는 선진국 못 간다. 삼성 같은 회사가 수십 개 있으면 좋지만 하나의 가능성이다. 수백 개의 중견기업이 크는 게 더 가능성이 있다.”

따지고 보면 이마트 발언, 직접 가격규제는 모두 이런 철학에서 나온 것이다.

권 위원장은 기자와 만나 “공정위가 열심히 일하면 혜택은 소비자에게 돌아가는데 그걸 몰라주니 우린 ‘외로운 조직’이다”고 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공정위가 열심히 일할수록 기업은 바들바들 떨고, 소비자들도 찜찜해하니 문제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권 위원장의 이런 행보에 줄곧 손뼉을 쳤다. 최근엔 “자유로운 시장 얘기는 그만 하고, 투명하고 공정한 시장 얘기를 하자. 공정위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했다. 대통령이 권 위원장을 낙점하면서 “정치 하다 보면 챙길 사람이 있는데 공정위원장은 그렇게 못하고 적임자를 찾아 임명했다”고 말했을 정도니 그만한 후원자도 없다.

머지않아 대통령이 바뀐다. 기업들은 새 정부의 공정위가 어떤 변화를 보일지 기다리고 있다. 적어도 내년 가을엔 공정위와 권 위원장이 뉴스에 등장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