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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북한 사설

대통령의 섣부른 지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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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노무현 대통령의 중요한 문제점 중 하나가 경박한 언행이라는 건 새로운 게 아니다. 자신도 최근 인터뷰에서 취임할 때 대통령에 맞는 말씨가 준비되지 않았었다고 자인한 바 있다. 한국 현대사에 대한 비뚤어진 시각, 주류에 대한 편협한 반감, 헌법 무시 등도 물론 중대한 하자다.

그런데 지난 재임 기간 중 드러난 또 하나의 결점은 ‘섣부른 지식’이다. 대통령은 세계와 한국의 중요한 사안에 대해 잘 아는 것처럼 과감하게 얘기하는데 부정확한 경우가 많다. 종이 울리기도 전에 보란 듯 답안지를 제출하고 교실을 나갔는데 점수가 형편없는 학생 같다. 대통령은 어떤 때는 사법시험 합격이란 경력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틀린 얘기를 한다. 국민은 대통령이 좌냐 우냐에 앞서 정(正)이냐 오(誤)냐를 걱정해야 한다.

가장 최근의 사례가 그제 혁신 벤처기업인 특강에서 한 말이다. 그는 “보수주의는 전통적으로 대외정책에 있어 대결주의를 취한다. 지금 미국을 보라. 일본의 보수주의를 보라. 대결주의 입장에 항상 서 있다. 그래서 평화는 진보주의에 가깝다”고 말했다. 그는 부시 미국 공화당 정권의 이라크 침공이나 일본의 태평양전쟁과 대결적 대북정책 등을 암시했던 것 같다. 그러나 논리가 틀렸다. 진보적인 영국의 토니 블레어 노동당정권은 이라크 침공에 적극 가세했고 우파인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전쟁에 반대했다. 베트남전 확전을 추진한 건 미국의 민주당 정권이었다.

전쟁이냐 평화냐를 결정하는 것은 보수냐 진보냐가 아니다. 국익이다. 아르헨티나가 영국령 포클랜드를 침공했을 때 대처의 보수당 정권이 아니라 노동당 정권이었다면 전쟁을 하지 않았을 거란 얘기인가. 남한을 침공해 한국전쟁을 일으킨 북한 김일성 정권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옛 소련은 보수였나 진보였나.

노 대통령은 인기를 잠시 잃더라도 장기적으로 국가에 도움이 된다면 소신을 지켜야 한다는 사례로 캐나다 멀로니 총리를 들곤 했다. 멀로니의 보수당이 연방부가세를 도입해 두 석만 남기고 몰락했지만 부가세 덕분에 캐나다는 재정흑자로 돌아서고 경기가 회복됐다는 거였다. 그러나 멀로니의 패배에는 퀘벡 지역 분리독립 투표 실패 등 다른 이유들이 있었다. 그리고 재정흑자도 부가세보다는 경기 회복 덕분이며 멀로니의 부가세는 역사상 최악의 장기불황을 가져왔었다는 게 캐나다 경제학자들의 평가다 (본지 2006년 6월 5일자 3면). 인용을 하려면 정확히 해야한다.

노 대통령은 2003년 1월 취임사 준비위원들에게 지도자의 덕목으로 신뢰·공정·성실·절제·헌신·책임을 꼽았다. 그가 ‘정확한 지식’을 뺀 것은 스스로 자신이 없어서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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