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책과주말을] '알파 걸 신화'에 알알이 깃든 아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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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슈거리스 러브
야마모토 후지오 지음,
한희선 옮김
창해,
304쪽, 9500원

엄마 같은 여자가 되기는 싫었다. 마음대로 불어난 몸매에 푸석한 얼굴. 엄마의 무기력한 눈동자는 아빠에게도 나에게도 향해 있지 않았다. 텔레비전 앞에 아무렇게나 누워 과자를 씹는 것이 유일한 소일거리. 예쁘고 날씬한 부하직원과 바람 나버린 아빠보다 엄마가 미웠다. 나보다 고작 열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아빠의 ‘그녀’ 보다 엄마가 미웠다. 그래서 나는 엄마와 닮아가지 않으려고 나 자신을 혹독하게 다그쳤다. 끝내 나는 ‘그녀’를 닮은 아가씨가 됐다. 그러는 사이 스물다섯 젊은 내 몸 속은 먹을 것 하나 없는 냉장고처럼 텅 비어 버렸다. (‘그녀의 냉장고’ )

능력과 미모를 겸비한 ‘알파 걸’ 시대. 여성들은 무의식 중에 주눅 들어 사는지도 모른다. ‘알파 걸’ 신화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지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이 단편소설집은 왕자님 따위는 찾아 오지 않는다는 현실을 알아버린 신데렐라들의 이야기다.

열 명의 젊은 여성들은 각자의 아픔을 고백한다. 사랑을 위해, 성공을 위해, 행복을 위해 전력질주 해 온 그녀들을 기다리는 것은 성취의 기쁨이 아니었다. 골다공증, 아토피성 피부염, 변비, 자율신경 실조증, 미각장애, 알코올 의존증…. 노력의 대가는 일상을 뒤흔들 만큼 고통스런 병이었다.

다소 설정이 과장된 부분도 눈에 띄지만 저자는 오늘의 병증을 실제 질병으로 매끄럽게 연결했다. 일본 최고의 대중문학상으로 불리는 나오키상 수상 작가다운 섬세한 필력도 인상적이다. 인스턴트 음식으로 끼니를 때워가며 일에 매달리는 낮, 살 찌는 것이 두려워 화장실 변기를 그러안고 토악질하는 밤. 인정받고 싶고, 사랑 받고 싶어 물 위의 백조처럼 버둥대는 그녀들의 일상은 설탕 시럽을 뺀 아메리칸 커피처럼, 씁쓸하다. 치열하게 오늘을 사는 2030 여성들에게 위무가 될만한 책이다.

이에스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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