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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하게 쏟아낸 말·말·말 … 국내외 지성 133명의 기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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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한국 진보 학계의 대표 지성 백낙청(잡지 ‘창비’ 편집인) 서울대 명예교수가 1968년 1월부터 2007년 6월까지 40년간 했던 대담·좌담·토론·인터뷰를 한데 모은 책이 나왔다. 5권으로 구성된 『백낙청 회화록』(이하 『회화록』·창비)이다. 글이 아닌 말로 보는 백 교수의 시대적·현실적 발언 모음집이다. 올해 고희를 맞은 백 교수를 위해 염무웅 영남대 명예교수를 비롯해 임형택(성균관대)·최원식(인하대)·백영서(연세대, 창비 주간) 교수 등이 간행위원을 맡아 지난 1년여간 준비해 온 결실이다.

 이번 『회화록』에서 백 교수와 만나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인물은 모두 133명. 백철·김동리·선우휘·박현채 등 작고한 인물과 리영희·강만길·이매뉴얼 월러스틴·프레드릭 제임슨·가라타니 고오진 등 다양한 전공의 국내외 지성이 망라됐다. 1966년 그가 창간한 잡지 ‘창비’(원래 이름은 창작과비평)를 비롯해 다양한 국내외 언론이 회화의 장소였고, 그 중그 중 ‘창비’는 가장 큰 마당이었다. ‘창비’와 회화를 통해 그는 우리 시대의 담론을 주도하며 현대사의 고비마다 대화의 물꼬를 터왔다.

 회화록은 말그대로 만남과 대화의 기록일 뿐이지만, 그 주체가 ‘백낙청’이란 점에서 한 시대의 중간 정리라는 느낌이 든다. 무엇보다 백 교수가 나눴던 이야기가 다른 이들의 그것과 구별되는 특징 때문에 그렇다.

언제나 그때그때의 첨예한 현실적 문제들이 도마에 올랐고 치밀하게 파고들었다. 이를 통해 지난 40년 세월 그가 쏟아낸 말들은 우리 현대사에서 하나의 방향타 역할을 해왔음도 새삼 발견한다. 70년대 민족문화론, 90년대 분단체제론에 이어 2000년대 들어 내놓은 ‘변혁적 중도주의론’ 등과 관련된 그의 말들이 이번 회화록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창비측은 이번 『회화록』을 133명의 국내외 지식인과 함께 한 ‘40년간 집단 지성의 기록’이라고 표현했다. 백낙청을 축으로 정리한 현대 우리 지성사의 축약이라고도 할 만하다.

 17일 『회화록』 출간을 기념해 연 기자간담회는 또 하나의 회화 마당이었다. 백 교수는 “고맙다”는 말로 회화를 시작했다. 함께 ‘회화’에 참여한 모든 이들과 『회화록』이 나오기 까지 고생한 이들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만감이 교차하는 듯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는 “우리 지식인들이 그래도 한 시대를 꽤 치열하게 살아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며 “우리나라에 토론문화가 없다고들 하는데, 그래도 토론이 꾸준이 이어져 왔다는 생각”이라고 자평했다.

이어 그는 “고은·신경림·김지하·황석영 등의 문인과 리영희·강만길·박현채 등 당대의 이론가들이 활약하던 70년대에는 우리 담론의 활력이 넘쳤었다”고 회상하면서 “요즘은 ‘창비’의 특징인 권두 좌담을 매호 싣기가 힘들 정도로 상황이 바뀌었다”고 아쉬워했다. 학계 원로로서 젊은 학자들이 공력을 더 쌓아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백 교수의 회화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언제일까. 그는 1980~85년의 5년간을 꼽았다. 박정희 정권의 유신시대 때도 힘들기는 했지만 80년대 초반처럼 ‘창비’같은 잡지를 폐간시키지까지는 않았다고 했다. ‘창비’가 폐간된 80년 이후 5년간은 이번 『회화록』에서 암흑기다. 아예 공백으로 비워놓았다.

 지난해 이후 그의 회화 주제는 ‘변혁적 중도주의’다.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대표인 백 교수가 ‘한반도식 통일’을 기대하며 내놓은 이론이다.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대표라는 공식 직함은 그의 ‘회화 형식’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마치 정치인들이 그렇듯 같은 내용을 반복하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했다. 짧은 글과 짧은 인터뷰 형식이 늘었다. 그는 이런 처지에서 벗어나 한층 대화적인 토론에 몰두 했으면 한다고 했다.

 이날 간담회에서도 변혁적 중도주의를 많이 언급했다. 백 교수는 “우리 사회의 복잡한 문제를 정리하고 통합할 유일한 길은 변혁적 중도주의”라고 강조했다. 그는 변혁적 중도주의를 일부 정치인들이 인기 전략으로 구사하는 ‘중도 마케팅’과 구별해 달라고 했다. 한반도 상황에서 최대의 과제는 분단체제의 극복이며, 그것은 혁명도 아니고 개량도 아닌 ‘변혁적 중도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의 요지다.

 ‘1980년대를 맞이하여’처럼 1980년 ‘창비’ 봄호에 실릴 예정이었다가 비상계엄 당국에 의해 삭제된 글이 이번에 처음 빛을 보게 됐다. 일본 ‘세카이’지에서 가라타니 고오진 등과 나눈 좌담 등 외국 지면에 실렸던 글도 번역돼 소개하고 있다.

 간행위원으로 참여한 백영서 ‘창비’ 주간은 “백낙청 선생의 평생 활동과 사상의 성격을 잘 나타내는 방식을 고민하다가 『회화록』 간행이란 초유의 시도를 하게 됐다”며 "저술 모음이라면 작업이 오히려 쉬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글=배영대 기자 , 사진=김형수 기자

『백낙청 회화록』 속 말말말

  “극복의 대상으로서 분단체제를 말한 겁니다. …남북한 모두가 포섭된 하나의 체제를 인식하자는 거지요. 그렇다고 완결된 체제는 아니고 말하자면 분단체제는 세계체제의 한 하위체제로서, 남북 양쪽의 대다수 보통사람들의 이익에 위배되고 전세계적으로도 보통사람들의 일반적인 이익에 반대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제4권, 1999년 ‘창작과비평’ 수록, 미 뉴욕주립 빙엄튼대 이매뉴얼 월러스틴 교수와의 대담 ‘21세기의 시련과 역사적 선택-세계체제, 동아시아 그리고 한반도’ 중에서)
 
 “민족문학론이 지금 싯점에서 그 내용을 ‘분단체제 극복을 위한 문학’이라는 것으로 그 내용을 채울 수만 있다면 그것은 여전히 유효하다.”(제5권· 2005년 광복 60주년 기념 학술세미나 종합토론 ‘다시 민족문학을 생각한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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