眼福의 계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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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호 02면

가을바람이 솔솔 부니 가슴이 휑한데 벌써 2008년도 달력이 당도합니다. 요즘은 전시회 도록 대신 자신의 작품을 넣은 달력을 만드는 화가가 많아서 일찌감치 내년을 만나게 되네요. 새해를 맞는 마음이야 나이 따라 다르겠지만 다음 해 달력을 받는 순간 하게 되는 일은 거기가 거기 아닌가 싶네요. 우선 놀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되나 세어보고 긴 연휴는 어느 달에 숨어 있나 찾게 됩니다. 그러고 나면 가족 생일과 제사, 기념일 등 챙겨야 할 날을 기록하는데요.

순화동 편지

해마다 잊지 않고 따로 방점을 찍어두는 날이 있습니다. 혹시 적금 타는 날이냐고요? 어머니가 달력을 얻어오자마자 곗날을 적어두던 기억이 나긴 하네요. 동그라미를 치는 날짜는 5월과 10월 둘째주 일요일입니다. 이때는 무슨 일이 있어도 거길 가야 합니다. 혹시 정인(情人)을 만나는 추억의 장소 아니냐고요.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거기서 마음을 뜨겁게 해준 수십 명의 사람과 정을 나눴으니까요.

그곳은 서울 성북동 성북초등학교 정문 옆 간송미술관(02-762-0442)입니다. 간송(澗松) 전형필(1906~1962) 선생이 일제강점기에 자칫 나라 밖으로 뿔뿔이 흩어져 사라져버렸을 우리 미술품을 전 재산을 털어 온전히 갈무리해둔 곳이죠. 선생의 뜻을 이어 소장품을 보석 갈 듯 지켜온 한국민족미술연구소(연구실장 최완수)는 1년에 두 번 5월과 10월에 2주씩 정기전을 여는데 올 가을로 벌써 일흔세 번째를 맞이하네요.

14일부터 28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 제목은 ‘현재 심사정 탄신 300주년 기념 현재 화파(畵派)’입니다. 조선 후기의 걸출한 사대부 화가로 꼽히는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 1707~1769)이 태어난 지 300년이 된 해를 기념하는 전시라는데요. 현재의 작품 50여 점에 동료와 제자 작품까지 100여 점이 나오는 가운데 특히 현재가 타계하기 한 해 전에 그린 ‘촉잔도권(蜀棧圖卷)’은 화가의 득의(得意)가 느껴지는 절품(絶品)으로 눈이 행복해지는 걸작입니다.

현재는 조선 남종화(南宗畵)를 완성한 화가로 평가받습니다. 중국 남종화를 조선의 그림으로 갈고닦은 뒤에는 불우했던 삶을 뼈저린 노력으로 극복한 얘기가 있지요. 할아버지의 과실로 평생 과거를 볼 수 없게 된 그는 어쩔 수 없이 화가의 길을 걸어가며 스승이자 큰 화가였던 겸재 정선(1676~1759)의 그늘에서 그를 뛰어넘을 자기만의 몸부림을 쳤던 거지요. 그래서 ‘촉잔도권’ 앞에 서면 한 인간이 온몸으로 걸러낸 어떤 슬픔을 느끼게 됩니다. 그 순간, 현재 심사정은 보는 이의 영혼을 흔드는 정인이 되는 것입니다.

간송미술관에 가서 그림만 보면 그에 못지않은 볼거리를 놓치는 꼴이 되니 꼭 챙길 것이 있는데요. 최완수 연구실장이 미술관 앞마당에 튼실하고 푸지게 키운 여러 가지 토종 꽃과 나무, 공작과 닭입니다. 그들 또한 눈을 맑게 씻어주니 봄·가을 여길 안 다녀가면 허전하다는 분이 왜 많은지 이해가 갑니다. 입장료가 얼마냐고요? 공짜랍니다. “이게 다 국민 재산이니 어찌 돈을 받겠느냐”시니 마음이 훈훈해질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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