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슬아슬한 에로티시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중앙SUNDAY

고대 동굴에서 에로틱한 벽화가 발견되듯 에로티시즘은 문학과 미술 등의 표현을 통해 인류 역사와 그 궤를 같이해 왔는데 현대사회는 바야흐로 에로티시즘의 대중화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에로티시즘이란 인간 신체의 모든 부분, 특히 얼굴과 의복 등에 집중되어 있는 성적 매력으로 성욕의 전 영역에 퍼지는 ‘신비한 상상’”이라고 한 에드가 모랭의 말처럼 에로티시즘은 성의 구체적 현상이 아니라 그것을 환기시키거나 암시하는 성의 감각적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10여 년 전 누드사진전 ‘체(體)· BODY’를 열었을 때 숱하게 받은 질문 중 하나가 ‘예술과 외설’의 한계가 어디냐는 것이었다. 시각예술에서 에로티시즘과 포르노그래피의 경계는 참으로 애매모호한 것이고 몇 마디로 단정 짓는 것은 매우 무모한 일이지만 나는 일관되게 분명한 선을 긋는다. 그림이든 사진이든 아니면 영화든 그 작품을 만든 작가가 어떤 의도를 갖고 만들었느냐는 것과 그 작품을 감상한 관객이 어떤 느낌을 받았느냐가 그 작품의 예술성과 외설을 구분지어 주는 중요한 잣대라는 것이다.

Nude와 Naked가 옷을 벗었다는 같은 뜻임에도 불구하고 누드와 나체라는 다른 느낌으로 쓰이고 받아들여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에 따라 예술과 외설을 구분짓고 수용하는 잣대도 수정되고 변화되게 마련이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가족이 함께 보는 드라마에서 키스신 같은 에로틱한 장면이 나오면 서로 불편해했지만 지금은 대수롭지 않은 상황이다. 그만큼 사회 전반에 걸쳐 에로티시즘이 보편화되어 왔다.

대량매체 시대가 읽는 것에서 보는 것으로 옮겨가는 현대사회에서 사회적·도덕적 저항에도 불구하고 상업성을 이유로 시각적 에로티시즘을 광범위하게 활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회가 건강하고 성숙한 만큼 이제 이러한 시각적 에로티시즘을 비하하거나 저속한 것으로 치부하고 염려할 필요는 없다. 이를 긍정적으로 수용한다면 건강한 에로티시즘의 표현은 오히려 우리의 생활을 밝고 활기차게 해주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다. 그 대상이 활력 넘치는 스포츠일 경우 더욱 그렇다. 88서울올림픽 당시만 해도 우리에게 생소했던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이 인기 종목이었던 이유가 무엇이었겠는가. 프로야구장의 관중 중에는 경기보다 치어리더들에게 더 관심이 많은 이가 적지 않고, 비치발리볼이나 여자체조 또는 피겨스케이팅, 여자농구 등에 남성 팬이 많은 이유도 스포츠의 에로티시즘과 무관하지 않다.

‘테니스의 요정’이라 불리는 마리아 샤라포바가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있는 것도 그녀의 기량과 함께 외모와 성적 매력이 큰 몫을 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지난여름 2007년 US오픈테니스대회에 출전한 그녀는 새로운 디자인의 유니폼을 선보여 대회 초반에 탈락했음에도 불구하고 또 한 차례 대단한 관심을 끌기도 했다.

스포츠 사진에서 보이는 에로티시즘은 1000㎜급 초망원렌즈의 등장과 같은 카메라 기술의 획기적 발달과 스포츠 의상이나 규칙 등 스포츠산업의 발전이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상업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프로스포츠는 대중의 관심과 호응을 얻기 위해 어차피 다양한 방법을 동원할 수밖에 없는데 그중 하나가 에로티시즘의 적절한 활용이다. 사실 에로틱한 스포츠 사진의 대부분은 선수 스스로가 계획하고 연출한 모습이 결코 아니다. 선수의 무의식적인 동작이 사진가의 집요한 추적에 의해 찍힌, 우연하고 결정적인 순간이거나 테니스나 체조경기 등에서 사진가가 선수의 경기 동작을 독특한 위치와 앵글로 잡아낸 것이다.

사진은 찍는 위치와 앵글, 그리고 촬영거리의 변화에 따라 사물의 느낌이 확연히 달라진다. 스포츠 사진도 예외는 아니다. 체조나 육상경기 등에서 보여주는 에로틱한 사진이 좋은 예다. 이달 초 대구 국제육상대회에 참가한 장대높이뛰기 선수 옐레나 이신바예바가 그녀의 훌륭한 기량과 함께 우리들 기억 속에 각인된 이유도 스포츠 사진가들이 잡아낸 에로틱하고 멋진 포즈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스포츠 경기 중계 장면을 보면 수많은 카메라맨이 서로 좋은 위치를 확보하려고 경쟁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한 장의 ‘결정적 순간’을 잡기 위한 그들의 집념과 노력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지만 최근 스포츠 사진 속에 나타나고 있는 에로티시즘이 날이 갈수록 예술적 가치보다 성의 상품화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고, 선수 기량이나 경기의 중요 내용보다 성적 매력에 우선적 가치를 두고 있는 것은 한번쯤 생각해볼 문제다.

세상만사 과유불급(過猶不及)이다. 지나치게 에로티시즘을 내세우다 보면 정작 스포츠에서 가장 중요한 경기의 내용이나 선수의 훌륭한 기량을 간과하는 우(愚)를 범할 수 있고, 독자들이 불쾌해하거나 식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스포츠산업의 건전한 발전과 우리의 밝고 건강한 삶을 위해서도 스포츠 사진에서 에로티시즘이 건전한 상식의 큰 틀을 벗어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유병용 사진작가 <3670@joongang.co.kr>

중앙SUNDAY 구독신청
[J-HOT]

▶토종박사들 "뉴욕대 교수 되니까 국내 명문대 러브콜"

▶'아슬아슬' 스포츠 사진 속 예술과 외설 사이

▶구본무 LG 회장 마침내 껄껄 웃었다

▶지지율 5% 문국현에 '올인' 느는 이유는

▶성행위 때 아내가 얼굴을 찌푸린다면…

▶성폭행 후 피해자 사진 자신의 블로그에 올려 '충격'

▶배우 성현아, 한 살 연하 사업가와 12월9일 결혼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