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비서실>186.공천뒤집기 내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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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88년3월17일 오후 청와대.
『權翊鉉고문이 공천에서 탈락한다고 신문에 났는데 사실입니까.
』 공천심사위원장이면서도 발표 하루전날 신문보도를 보고 權고문의 공천탈락 사실을 알게된 蔡汶植대표는 청와대로 허겁지겁 달려와 대통령에게 직접 사실을 확인하고자 했다.
『그게 신문에 났어요?』 盧泰愚대통령다운 되물음이었다.석간신문에 대서특필돼 이미 시내 전역에 다 뿌려졌다는 말에 盧대통령은 마지못한듯『軍선배들이 權고문에 대해 탐탁치않게 생각한다』는설명을 덧붙였다.
蔡대표는『이런 중진을 탈락시키고는 선거를 못치릅니다』라고 강하게 번의를 요청했다.그러나 의외로 盧대통령의 반응은 냉담했다.대통령은 거기에 주목할만한 두마디를 덧붙였다.
『충분히 많이 당선될 겁니다.걱정마세요.』 『蔡대표는 새로운정치 구도에 대해 이해를 못해요.』 이 두마디는 당시 盧대통령의 정치구도와 정황인식을 말해준다.
「충분히 많이 당선된다」는 말은 당시 권력 핵심의 자만이나 잘못된 상황인식을 나타낸 것이었다.권력을 잡게된 어느 집단이나마찬가지로 6共 핵심세력 역시 정권출범 초창기 일시적으로 치솟게 마련인 거품인기를 집권세력에 대한 정치적 지 지로 착각했던것이다.그러나 실제 상황은 그렇게 낙관적이지 못했고,결국 이같은 자만심은 총선에서의 패배와 與小野大 국회라는 정치적 위기상황을 초래하게 된다.
두번째「새로운 정치구도를 이해하지 못한다」란 면박은 5共 인물이랄 수 있는 蔡대표는 이해하지 못하는「새로운 6共식 정치구도가 공천의 기본틀」이라는 솔직한 고백인 셈이었다.이같은 6共측의 입장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지만 5共과의 관 계속에서 내놓고 얘기하지 못하던 속마음을 대통령이 직접 언급했다는 점에서주목할만한 일이었다.
어쨌든 면박을 당한 蔡대표는 盧대통령의 강한 의지를 확인하고밤늦게 급거 귀경한 權고문의 북아현동집을 찾아갔다.위로의 술자리가 밤늦게까지 계속됐고,공천심사위원에서 탈락한데 이어 지역구공천에서마저 탈락한 鄭石謨의원도 동석해 權고문을 위로했다.이들세 사람은 불과 5일전 蔡대표가 鄭의원의 공천탈락을 통보하던 자리에서도 함께 만났었다.그때만 해도 權고문은『정치란 다 그런거야』라며 鄭의원을 위로했는데 불과 며칠만에 같은 위로의 말을거꾸로 받아야 했다.
權고문은 또 보좌관.비서관등 측근들을 같은 말로 다독거렸다.
『정치하다 보면 그럴 수 있다.盧泰愚 욕하지 마라』하고 지시하기도 했다.그리고 독실한 불교도인 그는 조용히 전국의 名山.名刹을 유랑했다.이같은 隱忍自重의 결과인지 그는 결 국 4년뒤인92년 盧대통령에 의해 다시 전국구의원에 임명돼 정계에 복귀하게 된다.적어도 정치판에서는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다는 현실을확인해주는 대목이다.물론 정치는 현실이지 감정은 아니니까 인간적 감정이야 별개이겠지만….
그러면 權고문의 탈락은 어떤 과정을 거쳐 결정됐는가.
공천심사는 2중.3중의 밀실작업이었으며,그중에서도 權고문의 탈락은 가장 은밀하게 결정됐다.安家까지 빌려 밀실작업을 한 黨의 공천심사는 일단 그 존재가 공표된 공식적 절차였으므로 사실가장 공개적(?)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그러나 관심있는 인사의공천결정은 비공식 심사로 보다 깊숙한 밀실에서 이뤄졌으며,은밀한 밀실작업일수록 결정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사실 權고문의 공천탈락은 이미 언론에 보도되기 며칠전 아주 은밀한 밀실심사에서 결정되어 있었다.확실하게 말하 자면「盧대통령과 權고문의 오찬모임이 있었던 3월14일 오후부터 당정 핵심간의 밀실회의가 있었던 3월16일 밤까지의 사이 어느 시간」이었다.궁정동 安家에서 열렸던 군출신 핵심 모임이 權고문의 탈락을 최종 결정지은밀실회의였다.회의 날 짜는 관계자들이 기억해낸 당시 정황으로 미뤄 수요일인 16일 오후로 추정되고 있다.
그날의 상황을 차근차근 살펴보자.黨공천심사위원회의 심사가 끝날 무렵인 이날 崔秉烈정무수석은 盧대통령으로부터 5명의 이름이적힌 쪽지를 받았다.「權翊鉉.權正達.李鍾贊.金相球.裵命國」.모두 육사출신으로 5共 거물이었다.이미 일단락된 黨공천심사에서 공천이 확정된 인물들인데 재검토를 지시한 것이다.다시 말해 공천에서 탈락시키라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崔수석은 安武赫안기부장에게 연락해 6共의 군출신 핵심인사들을긴급히 소집할 것을 부탁했다.군출신에 대한 공천을 결정하기 위한 밀실회의는 주로 이렇게 군출신 6共 핵심들에 의해 이뤄졌으며,이미 몇차례 모임을 통해 심사작업이 이뤄져왔 던 터였다.
이날 회의 참석자는 崔수석. 安부장외에 兪學聖.李春九.許三守씨등이었다.黨공천심사위원으로 安家에 연금돼있던 李의원은『멀리서친척이 귀국해 마중가야 한다』는등의 핑계를 대고 가끔 외출하곤했다.崔수석이 명단을 내놓고 대통령의 뜻을 전 하자 찬반이 갈렸다.『대통령의 뜻이라면 그렇게 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安부장.李의원등은 강하게 반대했다.그러나 盧대통령이 없는 상태에서이미 떨어진 그의 지시를 번복할 수 없었기에 논의는 진전이 없었다.마침내 성격이 급한 安부장이 『盧대통령에게 직접 얘기하겠다』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청와대로 올라갔다.바로 이때 盧대통령은 부인과 함께 테니스를 치기 위해 청와대 본관을 나서던 중이었다.
***李.裵의원 막판回生 이 대목이 바로 궁정동 밀실회의 날짜(3월16일)를 확인해준다.당시 청와대에서 수요일 오후는 1주일에 한번인 체력단련시간이었고,盧대통령은 주로 이 시간에 테니스를 많이 쳤다.청와대 테니스장에는 야간조명시설이 있어 드물게는 평일 일 과 후에도 테니스를 치기는 했지만 安부장이 찾아갔을 때는 아직 밝은 낮시간이었던 사실로 미뤄 수요일이 분명해보인다. 安부장은『공천문제에 대해 급히 상의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라고 말하자 盧대통령은 테니스장으로 향하던 발걸음 그대로인채『상춘재(본관과 떨어진 한옥 별채)로 들어가 얘기하자』고 했다.대통령은 간단히 얘기를 끝내고 테니스를 치러갈 요량이 었던듯하다.그러나 얘기는 쉽게 끝나지 않았다.
安부장은『이런 식으로 공천탈락시키면 선거치르기 힘들다』며 번의를 요청했다.끈질긴 번의요청으로 얘기는 40여분이나 계속됐지만 盧대통령은 평소와 달리 매우 단호했다.盧대통령이『이미 결심했으니 더 얘기하지 마라.安부장은 정보책임자로서 대통령인 내 의견을 따라달라』는 말로 얘기의 종지부를 찍었다.군출신인 安부장은「정보책임자로서 대통령의 命을 따라야 한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더이상 할 말이 없었다.대신 개인적으로 납득하기 힘들다는 점은 분명히 밝혔다고 한다.
安부장이 청와대로 올라가 盧대통령의 단호한 의지를 확인하고 내려온 뒤부터 논의는 급진전됐다.대통령의 진의가 확인된 이상 반대의견은 이미 의미가 없었다.이같은 진통끝에 權고문의 공천탈락은 이날 모임에서 사실상 확정됐고,이후의 과정은 사실상 통과의례에 불과했다고 볼 수 있다.
밀실정치.밀실공천의 관행은 늘 이런 식이었다.
대통령의 메모에 있던 5명중 실제 탈락자는 兩權씨와 金相球의원까지 3명,李鍾贊.裵命國의원등 2명은 저승사자 앞에까지 갔다되돌아왔다.생사가 갈린 배경은 다음 회에서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吳炳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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