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자의종말>3.팔레비-암투위협에 쫓겨 영구망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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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모하메드 레자 팔레비 아르야메르 이란國王은 여느 독재자들의 종말보다 더한 고독과 우울,좌절과 환멸의 恨을 품은채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암살위협에 대한 공포.지병의 고통이 영욕의 60년을 마감하는마지막 순간까지 따라다녔다.
그가 파라 왕비와 함께 영구 망명길에 오른 79년 1월16일은 이란 회교혁명사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으로 꼽힌다.
38년간 페르시아灣의 석유왕국을 강권 통치해온 팔레비는 이날떨리는 목소리로『짐은 피곤해서 잠시 쉬러가는 것일 뿐』이라는 짤막한 출국성명 낭독을 마지막으로 오랜 王政에 종지부를 찍었다.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군용기트랩에 오른 독재 자의 망명길에동행한 것은 부인과 조국의 흙 한줌이 전부였다.
팔레비는 아버지 레자 칸 총리가 카자르家의 아메드王을 국외로추방한뒤 조성한 왕조의 2대王으로 41년 9월 즉위한다.그의 나이 약관 22세.
49년 5발의 총격을 받고 51년 8월에 격렬시위로 로마에 잠시 망명하기도 하는등 왕권을 흔들었던 네차례의 위기를 무난히극복한 그는 63년 화려했던 옛 페르시아 제국의 재건과 근대화를 겨냥한 이른바「白色혁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
봉건주의 타파를 모토로 내건 이 개혁은 당시 매우 광범위하고급진적인 정책으로▲회교사원소유 토지의 국유화▲여성투표권 부여를포함한 여성해방운동(파라왕비 주도)▲질병.문맹퇴치등이 골간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국민과 유리된 채 위로부터 강요된 백색혁명은 종교인.
지주를 포함한 기득권층의 반발로 그의 퇴진을 재촉한 회교혁명을유발하고 만다.더욱이 그의 충복인 6만여명의 비밀경찰 사바크는혁명추진에 반대하는 세력을 무조건 영장없이 납 치한 뒤 온갖 고문과 암살을 자행,민중의 원성을 샀다.
反팔레비 폭동으로 수천명이 사망한 뒤에도 가혹한 탄압이 계속되자 회교 시아派 지도자 아야툴라 호메이니는 망명길에 올라 터키.이라크.프랑스 등지를 전전하며 反정부 시위를 원격조정하기에이른다.73년 中東전쟁으로 전세계를 뒤흔든 오일 쇼크로 막대한외화를 벌어들이기 시작한 몇년간은 그의 전성기로 평가된다.
그러나 아랍의 맹주가 되고자 하는 야욕으로 막대한 무기를 사들이는 낭비벽에 40만군대 양성으로 아랍圈의 불안감과 국내 각계의 지탄을 유발했다.석유수출이 늘수록 서민 생활은 되레 피폐해져 유일한 지지기반이던 농민층의 이탈이 가속화 됐다.
눈이 멀고 귀가 막힌 그는 70년대 중반 집권말기부터 공무원부패.비능률 행정.富의 편중을 방조하며 고삐풀린 황소처럼 반대파 탄압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이같은 초강경 조치에도 불구,백색혁명에 대한 저지투쟁은 계속됐다.78년 12월 테헤란에서 1백만명이 참가한 최대규모 反王데모를 고비로 1년동안 1만명 이상이 숨진 민중봉기가「군주제 폐지」라는 승리로 귀결되자 이듬해 팔레비는 정처없는 망명길에 오른다.
1백억달러 이상의 재산을 스위스.미국등지에 빼돌린 팔레비였지만 호메이니의 사주를 받은 국제테러단의 공격목표가 될 것을 두려워한 각국 정부의 출국요구로 1년반 동안 이집트.모로코.바하마.멕시코.미국.파나마를 거쳐 다시 이집트를 전전 하는 국제미아로 전락하고 만다.
결국 그는 61회 생일을 3개월 앞둔 80년 7월27일 망명지 카이로의 마아디 軍병원에서 세번째 부인 파라 왕비가 지켜보는 가운데 임파선癌으로 생을 마감했다.이 측은한 전직 왕은 죽기직전까지도『나는 결코 국민을 배신하지 않았으며 국민들이 나를저버렸을 뿐』이라는 변명으로 일관했다.팔레비의 폭정은 엉뚱한 방향으로 불똥이 튀기도 했다.호메이니의 新정부가 79년 11월4일 그의 송환을 강력히 요구하며 테헤란주재 美대사관 직원 52명을 억류하는「인질파동」을 일으킨 것이다.
이로 인한 암살위협과 송환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쇠약해진 그의 수명을 더욱 단축시켰다.인질들은 81년초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취임한 뒤 4백44일만에 석방됐지만 팔레비는 끝내 조국으로부터 용서받지 못했다.
〈奉華植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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