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진공 이사 2명 노조 투표로 뽑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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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공기업도

2005년 3월 17일 광업진흥공사 대강당. 이 회사 직원들이 모여 상임이사 두 명을 투표로 뽑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광진공은 "급변하는 국내외 정세에 대처하기 위한 획기적 발상"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속내는 전혀 달랐다. 광진공은 입사와 동시에 노조 가입이 의무화돼 3급 이하 직원은 모두 노조원이다. 애당초 노조가 미는 후보가 될 수밖에 없는 구도다. 대강당에 모인 직원들 사이에서 "마침내 노조가 임원 인사권까지 장악했다"는 웅성거림이 나왔다.

'획기적 발상'을 주도한 당시 박양수 사장은 옛 열린우리당 창당 주역의 한 명. 2004년 사장 선임 발표가 나오자 노조는 즉각 '낙하산 인사'라며 반발했다. 박씨는 어렵사리 사장에 취임한 뒤 가장 먼저 노조 사무실부터 찾았다. 기묘한 '노-사 밀월관계'가 시작됐다. 지난해 박 전 사장은 기획예산처의 공기업 임금 인상 가이드라인(2%)을 완전히 무시했다. 사장이 앞장서서 "다른 공기업과 형평을 맞춰야 한다"며 임금을 7.2%나 올려버렸다. 여기에다 1인당 평균 1125만원씩, 355%의 성과급까지 줬다. 37억원에 이르는 성과급 총액은 지난해 광진공이 낸 흑자(28억원)를 훌쩍 뛰어넘었다. 지난해 14개 정부 투자.산하기관 사장 평가에서 박 전 사장은 13등에 그쳤다. 그러나 청와대는 그가 사장에서 물러나자 곧바로 대통령 정무특보로 발탁했다.

◆낙하산 대신 해결사 투입해야=청와대는 2003년 "참여정부는 낙하산 줄을 끊었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2006년 노무현 대통령 스스로 "낙하산이 나쁘다고만 말할 수 없다. 낙하산도 성공한 케이스가 있다"고 후퇴했다. 본지가 공기업과 준 정부기관 상임감사 54명을 조사한 결과 57.4%가 청와대.정치권 출신으로 나타났다. 22.2%는 관료 출신이었다. 공기업.준 정부기관의 대표이사 99명 가운데서도 청와대.정치권 출신이 22명(22.2%)이다.

박영범 한성대 교수는 "낙하산으로 내려온 인사가 노조의 반발을 무마하려다 보니 노조와 타협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말했다. 공기업 노조들도 낙하산 인사에 겉으로 반발하는 척하지만 내심 즐기는 경우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이런 코드 위주의 경영진이 노조의 눈치를 살피면서 공기업 집단 이기주의가 싹튼다는 지적이다.

이에 따라 공기업의 방만.부실 경영을 수술하기 위해 차기 정부에 역발상을 주문하는 전문가가 적지 않다. 낙하산 인사 대신 거꾸로 해결사를 투입하라는 것이다. 일본의 경우 우정성을 개혁하면서 노련한 민간 전문가들을 분할된 4개 회사의 CEO로 앉혔다.

◆공기업 구조조정.민영화가 해법='신이 내린 직장'이 스스로 기득권을 포기하기는 기대하기 어렵다. 상징적인 사례가 10년 묵은 과제인 농협의 경제사업과 신용사업 분리다. 94년 김영삼 정부가 처음 이 카드를 꺼낸 이후 새로 들어선 정권마다 공약한 사안이다. 그러나 정권 초에 확실한 개혁 로드맵을 짜지 않고 농림부에만 맡겨둔 결과 10년째 결론을 못 내렸다. 현 정부 들어서도 농림부는 4년을 끌다 올 3월에야 분리안을 확정했다. 그러나 분리 시점은 10년 뒤인 2017년으로 미뤄졌고, 그나마 경제사업이 잘 돌아가면 한다는 단서를 붙였다.

업무 영역이 중복되는 공기업들의 통합.구조조정도 시급한 상황이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석탄공사.광업진흥공사.광해방지사업단(옛 석탄산업합리화사업단)이다. 이들 석탄산업 관련 3개 공기업은 앞다투어 해외 자원 개발에 나서고 있다. 감사원이 동반 부실을 우려하며 주무 부처인 산업자원부에 통합을 권고할 정도다.

류상영 연세대 교수는 민간과 경쟁하는 공기업부터 민영화 재개를 주문하고 있다. 류 교수는 "과거 여섯 차례의 공기업 개혁 실패를 살펴보면 결국 가장 확실한 공기업 개혁은 민영화였다"라며 "아무리 거창한 공기업 개혁도 시간이 흐르면서 노조, 관료조직, 정치권의 저항으로 힘이 빠지게 마련"이라고 말했다. 지금은 청와대의 서슬 퍼런 공기업 옹호론에 짓눌려 있지만, 한때 정부의 최고위 정책 결정자들도 공기업 개혁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경제부총리 시절 "공기업의 퇴출이나 민영화가 생산성을 높이는 유일한 방법이라면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윤철 감사원장도 "역사적 임무를 다한 공기업은 퇴출돼야 한다"고 잘라말했다.


1999년 민영화 KTB네트워크 순익 400억 우량기업

공기업으로 남은 산은캐피탈 빚 2조6000억에 달해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KTB네트워크와 산은캐피탈(옛 한국기술금융)은 닮은꼴이었다. KTB네트워크는 과학기술부 산하기관, 산은캐피탈은 산업은행 자회사로 둘 다 공기업이었다. 정부 정책자금을 벤처기업에 빌려주거나 투자하는 업무를 주로 했다. 산은캐피탈의 자산은 3조원, KTB네트워크는 2조원이 조금 안 됐다. 외환위기가 터지자 두 회사는 나란히 벼랑 끝에 몰렸다. 벤처기업이 줄도산하는 바람에 빌려준 돈을 무더기로 떼였기 때문이다.

98년 말 KTB네트워크의 부채비율은 4478%, 산은캐피탈은 3257%로 치솟았다. 결국 정부와 산은에 손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정부가 KTB네트워크에 2000억원, 산은이 산은캐피탈에 3000억원을 증자해 가까스로 부도를 면했다. 그러나 99년 두 회사의 운명은 엇갈렸다. KTB네트워크는 민간에 팔려갔다. 반면 산은캐피탈은 한국산업리스와 합쳐지긴 했으나 공기업 지위는 유지했다.

8년이 흐른 지금 두 회사의 모습은 과거와 영 딴판이 됐다. 민간회사와 경쟁하게 된 KTB네트워크는 체질을 확 바꿨다. 정부 돈을 재대출하는 업무는 과감하게 접었다. 수익성은 낮고, 경기가 나빠질 때마다 무더기 부실이 났기 때문이다. 대신 민간자본을 끌어와 투자조합을 결성한 뒤 유망 벤처기업에 지분투자를 하는 사모투자회사로 변신했다. 군살도 말끔하게 뺐다. 자산 5000억원에 부채는 1579억원밖에 안 된다. 그런데도 한 해 300억~400억원씩 순익을 낸다.

이에 비해 산은캐피탈은 정부 돈에 기대는 기존 영업을 그대로 고수했다. 이 때문에 자산이 3조원으로 커졌지만 덩달아 부채도 2조6000억원에 이른다. 빚이 많은 만큼 경기가 나빠지면 부실화할 위험도 크다. 2002년 경기가 고꾸라졌을 때도 경영위기를 맞았다. 산은이 또 2400억원을 증자해 겨우 위기를 벗어났다. 덩치는 크지만 순익은 지난해 870억원에 불과했다. KTB네트워크 정동일 과장은 "공기업은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한 위기의식이 덜하게 마련"이라며 "우리도 공기업으로 남았다면 지금처럼 발 빠르게 변신하지 못해 경기가 나빠질 때마다 정부에 아쉬운 소리를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정경민 차장, 박혜민.윤창희.손해용 기자

▒바로잡습니다▒

공기업.준정부기관 대표·감사 명단에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김병익 위원장은 7월 사퇴했습니다. 현 위원장은 김정헌 전 문화연대 상임공동대표입니다. 또 한국방송광고공사의 감사는 현재 공석입니다. 표에 감사로 나온 한진수씨는 전무이사이기에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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