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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나마기자의영화?영화!] 에드워드 양 감독은 떠났지만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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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저는 한때 밤 9시면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고 철썩같이 믿는 아이였습니다. 매일 그 시간에 TV에서 “어린이는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 시보가 흘러나온 까닭도 있지만, 정말로 9시면 눈꺼풀이 무거워지곤 했거든요. 어른이 된 지금, 더구나 영화제가 한창인 부산에서 밤 9시는 너나없이 왕성하게 활동하는 때입니다. 극장 안은 상영이 한창이고, 극장 밖은 ‘파티’라는 좀 낯선 이름으로 온갖 만남의 행사가 자정을 넘겨서까지 이어집니다.

6일 열린 ‘아시아 영화인의 밤’ 역시 시작이 밤 10시였습니다. 부산영화제와 패션브랜드 에르메스 코리아가 함께 매년 ‘올해의 아시아 영화인상’을 주는 자리지요. 지난해 홍콩 출신의 스타배우이자 제작자인 류더화가 받았던 상입니다.

올해 수상자는 대만영화의 ‘뉴웨이브’(새 물결)를 이끌었던 감독 에드워드 양입니다. 알다시피 미국에서 암과 싸우다 올 6월 60세로 세상을 떠났지요. 많다고 볼 수 없는, 일곱 편의 영화를 남기고서 말입니다. 자연히 이날 대리 수상이 예정됐었습니다. 부인 카일라 펑과 아들 션 양(사진) 이었죠.

현장에 가 보니 션 양은 일곱 살 꼬마였습니다. 엄마 손을 잡고 일찌감치 행사장에 입장했는데 저런 저런, 공식 행사가 시작되기도 전에 앉은 자리에서 잠이 들었더군요. 엄마 카일라 펑은 시상 무대에 혼자 올라와 “시차 적응이 안 된 모양”이라며 양해를 구하고 인사말을 시작했습니다. “오늘이 마침 남편이 세상을 떠난 지 100일째 되는 날”이라며 “그의 영화정신은 다음 세대 감독들에게 이어질 것”이라고요. 그 사이 외국의 한 영화제 프로그래머가 소년을 안고 무대에 올라오더군요. 눈을 비비며 잠이 깬 소년은 아버지를 대신해 작은 손으로 핸드 프린팅을 하고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씩 웃으며 기념촬영까지 마쳤습니다.

공교롭게도, 시상 직전 행사장 스크린에도 어린 소년의 모습이 비쳤습니다. 감독의 마지막 영화 ‘하나 그리고 둘’의 마지막 장면이지요. 돌아가신 할머니를 향해 소년은 나 홀로 쓴 편지를 읽습니다. 편지의 마지막에 소년은 “저도 나이를 먹어요” 하고 말합니다.

몇 달 전 차례로 세상을 떠난 에드워드 양·잉마르 베리만·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세 감독에 대한 칼럼을 쓴 뒤 독자의 e-메일을 받았습니다. “심형래 감독님이 세상을 떠나도 이분들 기사처럼 비통하게 글을 쓰실 건가요”로 시작하는 내용이었지요. 답장은 보내지는 않았습니다만, 문득 심 감독이 퍽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관객의 성원을 피부로 체감하건 아니건 말입니다.

앞에 간 사람보다 뒤에 올 사람이, 만들어진 영화보다 만들어질 영화가 유리한 것은 가능성 때문이란 생각입니다. 아쉬움을 남기고 간 많은 영화감독이 있지만, 그 가능성을 보여주는 새로운 감독과 만나기를 더 기대합니다. 부산에서든, 어디서든 말이죠.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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