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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시각>어릴때부터 철학 가르치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5면

프랑스인들은 서양에서도 가장 수다스러운 민족으로 알려져 있다.예부터 파리의 살롱은 인텔리들이 모여 문학과 철학은 물론 세상사에 관해 수준 높은 대화를 나누던 곳이다.그러던 것이 18,19세기에 걸쳐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국민 모두가 카페에 가서정치나 사회적인 문제를 갖고 열변을 토하며 논쟁하는 문화가 정착되었다.
지금도 프랑스에 가 보면 커피나 맥주 한잔을 시켜놓고 몇시간이고 논쟁을 벌이는 사람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프랑스라는나라가 국제무대에서 자신의 국력에 비해 훨씬 강력한 발언권을 갖게 된 데는 이런 「논쟁의 문화」도 중요한 역 할을 했을 것이다.실제로 프랑스는 1,2차 세계대전에서 군사적으로는 패했지만 뛰어난 외교력을 발휘,전후에 득을 효과적으로 챙기는 실력을보여 주었다.
국제사회에서 그들의 발언이 설득력을 갖게 되는 것은 말이 논리정연하고 합리적인 사고에 바탕하고 있기 때문이다.프랑스는 가정교육에서부터 재치있게 말하기를 훈련시킨다.미국에서는 아이들이무슨 소리를 하건 귀담아 들어주는데 반해 프랑스 에서「쓸데 없는 소리」(논리에 맞지 않는 소리)는 가차없이 차단당한다.
이렇게 훈련된 아이들은 고등학교에서 철학과목을 통해 본격적으로 비판하는 능력과 자신의 생각을 전개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노동은 인간에게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수단에 불과한가』『타인의 눈길을 두려워해야 하는가』『국가는 자유의 적인가』.학생들은 이런 질문에 답하기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모두 동원해 가장 설득력 있는 모양으로 글을 만들어야 한다.
이런 교육은 인문계.자연계.실업계를 막론하고 실시되고 있으며대입시험「바칼로레아」에서도 철학이 필수과목이다.지난달 바칼로레아에 응시한 57만명의 젊은이들에게 주어진 철학과목 논문주제는『지식은 상상력에 대한 장애인가』『조리있는 사고 는 반드시 진실인가』『예술작품은 비도덕적일 수 있는가』『정열과 지혜는 양립할 수 있는가』등 4개.이중 하나를 택해 논문을 작성해야한다.
그야말로 앞으로 진정 학문을 배울 능력이 있는지,「수학 능력」을 평가하는 것이다.시험방식■ 논술식 으로 4시간 동안 치러지는데 학생들은 시험을 보고 나면 거의 탈진 상태가 된다.
서양에서도 철학을 고등학교 필수과목으로 가르치는 나라는 프랑스뿐이다.그 전통은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것이 중단된적은 나치 독일 점령아래 페탱 장군의 괴뢰정권이 들어섰을 때다.그것은 정통성이 없는 독재일수록 자유롭고 비판 적인 생각을 허락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으로 민주체제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를 요구한다.합리적이지 못하고 이성을 잃어버린 민주화는 자칫 집단이익을 위해 감정적인 행동을 일삼는 자들에 의해「난장판」이 되어버릴 위험이 있다.한국과 같이 독재에서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과 정에 있는 국가에서 철학교육을 통한 합리성의 제고는 커다란 의미가 있을 것이다. 더구나 지금은 국제화와 세계화에 대응해 나가야 할 시점이다.여기서 우리 정치인.공무원.기업인들이 외국인들과의 협상에서 호소력을 갖기 위해서는 뚜렷한 주장과 논리를 내세울 수 있어야 한다.단지 감정적인 자존심과 국수주의만을 가지고는 누구도 설득하지 못하는「외톨이」가 될 뿐이다.
주입식 교육,암기 중심의 교육은 누차 지적된 한국 교육의 고질적인 문제다.우리 사회에는 왜 그리도 남이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들이 난무하는 것인지,왜 외국인들은 우리를 철저한 국수주의자로 비판하는 것인지…우리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보 아야 한다.
우리도 이제 중.고교 교육과정에 합리적 논리체계를 배양시킬 철학을 필수과목으로 도입하는 문제를 신중히 검토해 봄직하다.그것은 민주화의 완성과 국제화 시대에의 대응을 위한 긴급한 과제의 하나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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