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노재현시시각각

둔감할 때와 민감할 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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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냥 둔감할 수 없는 장면들이 가끔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도착 첫날 노 대통령과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함께 카 퍼레이드를 할 때 수십만 평양 시민들이 길가에 나와 꽃다발을 흔들었다. “만세” “조국통일”을 외치며 발을 구르고 때로 울먹이는 여성들을 보면서 체제와 개인의 권리, 세뇌 등의 단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기 적부터 훈련받았을 그들을 무딘 눈으로 바라보기 힘들었다. 만수대 의사당 방명록에 대통령이 쓴 ‘인민의 행복이 나오는 인민 주권의 전당’이라는 글귀도 나를 민감하게 만들었다. ‘인민’이라는 용어에 담긴 고도의 이념성과 그로 인해 피에 물든 한국 현대사는 일단 접어두자. ‘행복이 나온’다니. 우리 대통령은 진심으로 만수대 의사당에서 북한 주민의 행복이 나온다고 믿는 것일까. 사실이라면 어처구니없는 일이고, 예의상 적당히 썼다면 거짓말을 한 셈이다. ‘주권’이란 용어도 마찬가지다. 남한 국민이 뻔히 보게 될 방명록인데 좀 더 신중하게 문구를 고를 수 없었을까.

『둔감력』이란 책이 있다. 올 상반기 일본 최대의 베스트셀러였다. 저자는 『실락원』으로 유명한 의사 출신 작가 와타나베 준이치. 둔감한 마음, 둔감한 오감(五感), 둔감한 장기와 체질을 가진 사람이 병에 덜 걸리고 연애에 성공하고 직장에서도 잘나간다는 내용이다. 역설적인 주장이어서 오히려 독자의 공감을 얻었다. 예를 들어 사람의 시력은 1.0~1.2가 정상인데 1.5~2.0쯤 되면 너무 잘 보여 피곤해지고 정신건강에도 마이너스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나도 정상회담 과정에서 벌어진 ‘사소한’ 일들을 그저 그러려니, 손님으로서 당연한 예의려니 둔감하게 보아 넘겨야 하는 것 아니었을까?

그런데도 나는 TV가 쏟아내는 장면에 점점 민감해졌다. 방북 둘째날 노 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에게 줄 선물 보따리를 풀었다. 12장생도가 담긴 여덟 폭 병풍도 그중 하나였다. 나전칠기 명장의 작품으로 제조원가만 1억원이 넘는다고 한 TV가 보도했다. “학의 깃털은 상아로 만들었고 거북이는 실제 거북이의 등껍질을 썼습니다”라는 기자 멘트가 덧붙었다. 뭔가 이상하다…. 예의 민감함이 또 발동했다.

코끼리 상아와 거북 등껍질은 멸종위기에 처한 야생 동식물을 보호하기 위한 위싱턴 협약(CITES)이 엄격하게 거래를 규제하는 물품이다. 금지된 재료로 만든 병풍을 우리 대통령이 북한 최고지도자에게 선물한 것이다. 청와대 사람들이 너무 둔감했던 게 아닌가. 작품을 만든 김규장(52) 명장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니 재료로 쓰인 상아·거북껍질은 우리나라가 워싱턴 협약에 가입(1993년)하기 이전에 입수한 것이라고 했다. 그나마 다행이다.

나는 이번 정상회담 성적을 100점 만점에 50점으로 본다. 그래도 만난 게 어딘데 하는 둔감한 눈으로 50점을 주었다. 울먹이며 흔드는 꽃다발이나 ‘인민’ 용어, 부적절한 병풍 재료 따위에 신경 쓴 것은 내가 너무 민감한, 좀스러운 체질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진짜 민감하고 초긴장해야 할 문제가 따로 있다는 것을 안다. 북한의 핵무기와 인권 문제다. 두 가지를 회담에선 흐지부지 얼렁뚱땅 넘겨버렸다. 이건 문제다. 둔감할 때와 민감할 때가 따로 있는 법인데, 너무 둔감했다. 50점은 그래서 깎았다.

노재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