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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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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인민의 행복이 나오는 인민주권의 전당’.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을 위해 평양 만수대 의사당을 찾은 노무현 대통령이 그곳 방명록에 기재한 내용이다. 인민이라는 용어가 눈길을 끈다. 자유민주주의를 골간으로 하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사용하기엔 뭔가 어색하다.

 인민이라는 단어는 사회·정치학적인 개념이다. 라틴어의 포풀루스(populus)라는 말에서 유래해 영어로는 피플(people)로 정착했다. 동양에서의 번역어가 인민인데,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사회주의 국가가 등장한 뒤 공산과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국가에서 국민을 가리킬 때 쓴다.

 동양에서 사람을 뜻하는 인(人)과 백성을 지칭하는 민(民)은 동의어 취급을 받는다. 당나라 때 일반 백성을 뜻하는 단어는 생민(生民)이었다. 그러나 당시 황제였던 태종의 이름이 이세민(李世民)이어서 불경함을 피하기 위해 백성 민자를 사람 인이라는 글자로 바꿔 쓴 기록이 있다.

 그러나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인과 민이라는 글자는 서로 혼용할 수 없다. 『예기(禮記)』에서 “사람이란 하늘과 땅의 마음(人者天地之心也)”이라고 했다. 과실의 속(心)을 일컬을 때도 사람 인의 글자가 쓰였다. 이는 흔히 어질 인(仁)이란 글자와 통용된다. 요즘 중국에서 과일의 속을 말할 때 ‘궈런(果仁)’이라고 하지만 원래는 어질 인자 대신 사람 인자로 표기했다.

 민이라는 글자는 백성 맹(氓)과 통용된다. 전체적으로 이 민이라는 글자에 따라붙는 색깔은 다소 어둡다. 사람 인이라는 글자가 지위의 고하, 출신의 귀천이 없는 개념인 데 비해 민이란 글자는 무지하거나 큰 자각이 없는 존재를 가리킬 때 흔히 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과 민이라는 글자가 동의어 취급을 받는 요즘이라 하더라도 성인(聖人)을 성민(聖民), 귀인(貴人)을 귀민(貴民)으로 대체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인민이라는 단어가 우리 눈에 익숙할 정도로 정착은 했지만 그 근원을 따져보면 다소 어울리지 않는 셈이다.

 더구나 이 인민이란 단어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중화인민공화국·라오스인민민주공화국의 명칭에서 나타나듯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국가의 전유물처럼 돼 버린 지 오래다. 그 가치가 전혀 다른 대한민국의 노무현 대통령이 북한에서 이 단어를 공개적으로 사용한 것은 부적절했지 싶다. 모처럼의 남북 정상회담이 큰 성과를 거두기 바라는 마음이다. 그러나 한국사회의 정체성을 간혹 잊는 듯한 대통령의 행보가 염려스러운 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마찬가지다. 

유광종 국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