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 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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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웬일일까.요란스럽게 대문을 흔들어대는 소리.하필이면 철제대문이 뭐람.형이 대문 밖에서 고함을 치고 있었다.형의 목은 가늘고 길어서 사과뼈가 유난히 눈에 띄지.
『…달수야 임마,문 열어.』 오늘같이 새벽에 들어오는 날이면형은 내 방 유리창에 콩알같이 작은 돌을 던지기가 일쑤였다.벨을 누르면 안방에까지 소리가 들리니까 내가 살짝 대문을 열어줘야 하는 거였다.그럴 때면 형은 발돋움을 해서 대문살 사이로 눈높이를 올리고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는 것이 만만한 아우라는 걸 확인하고는 속삭이는 거였다.빨리 열어 이 새끼야.
그런데 그날은 아니었다.형은 대문을 걷어차면서 당당하게 악을썼다.술을 마신게지.고양이도 술독에 빠졌다가 나오면 쥐새끼를 찾는다니까.
『야 달수 이 새끼야,문 좀 열란 말이야.』 나도 창문을 열고 소리쳤다.
『달수 잔다.』 『너 정말 장난칠거야 임마.』 내가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 쪽으로 가는데 형이 나쁜 새끼 어쩌구 하면서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형은 현관에서 가까운 쪽에 있는 내 방으로 들어왔다.깜깜했고,오히려 창으로 새어든 달빛이 겨우 윤곽이라도 알아볼 수 있도록 해주고 있었다.
『뭐야.불이 나간거야?』 내가 고개를 끄떡이기는 했지만 어두워서 못봤을 거였다.그래서 벨이 안울린 거였다.
『들어오셨어?』 형이 엄지손가락을 내 코 앞에 세워보이면서 목소리를 죽였다.대문을 걷어차며 큰소리 칠 때는 언제고.사실은언제나 대개 이맘 때쯤 해보는 소리였다.집에 늦게 들어오는 날이면-언제나 늦게 들어왔지만-형은 언제나 아버지의 귀가 여부를제일 먼저 물었고,내 대꾸도 항상 똑같았다.
『그럼,지금이 몇신데….』 사실 난 몇시인지 알지 못했다.자정이 넘었으면 그건 상관없는 거였다.
『그래,당연하지.…아버지가 아직 안 들어오셨을리가 없지.…그냥 물어보는거야.그건 나두 안다구.』 형은 술취했을 때의 이상한 억양으로 흥얼거리면서 내 침대에 벌렁 누웠다.사 입은지 일주일 밖에 안되는 마로 된 윗도리나 벗고 누웠음 좋지.
형은 가끔 그랬다.한달이면 서너번씩 그랬으니까 종종이라고 말해야 하는 건지도 몰랐다.술을 먹고 들어와서는 내 방에서 자는거 말이다.
우리는 게으른 형제였다.어차피 술 취한 사람 보고 이불을 깔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자다가 잠이 깬 나도 다 귀찮았다.형을밀어서-정확하게 말하자면 굴려서-벽쪽으로 모로 눕게 하고 나도침대 한쪽에 형에게 등을 돌리고 모로 누웠다.
부부싸움을 한 부부들이 이런 자세로 잘 거였다.
거칠게 몰아쉬는 형의 숨소리.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웬일일까.말도 안되는 말들로 나를 괴롭히려 들지 않으니… 그러고 있는데 과연이었다.
『야 달수야,자니.…난 이거 세상한테 아무래도 속은거 같단 말이야.…너 말이야,마지막 낙엽을 보고 센치하게 굴 나이는 지났다고 말하는 놈들이 왜 얼간이 인줄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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