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고 어두운 심연으로의 여행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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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호 13면

짐을 꾸렸다. 여행을 떠날 것이다. 어디로 갈지 언제 돌아올지 기약 없는 여행이다. 아무 계획도 없이 떠났던 것이 언제였는지 까마득하다.

소설가 천운영의 시네마노트-폴 그린그래스의 ‘본 얼티메이텀’

언제부턴가 내 여행은 수많은 정보를 바탕으로 숙식과 일정을 미리 구상하고 떠나는 방식이 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돌발적인 사건들이 안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이 글을 마치고 나면 꾸린 짐을 들고 훌쩍 떠날 것이다.

사람들은 곧잘 묻는다. 다음 생애에 뭐가 되었으면 좋겠느냐고. 혹은 현재 소설가가 되지 않았더라면 뭐가 되었겠느냐고. 무용가나 피아니스트 같은 걸 얘기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근사해 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냥 소설가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것밖에는 아는 게 없으니까. 그렇다면 낯선 장소에서 기억을 잃어버린 채 깨어난다면, 당신이 소설가라는 걸 어떻게 알겠는가. 글쎄. 근사한 펜과 노트만 보면 환장하게 좋아하거나 대단한 타자 실력을 발견하면 알게 될까. 아니면 자꾸만 거짓말이 하고 싶거나 뭔가 꾸며내고 싶어 하면 그렇게 느낄까. 소설가의 본성은 너무 미미하다. 소설가의 본성이라는 게 있기는 한 걸까.

킬러라면 좀 수월하겠다. 완벽하게 훈련된 킬러의 본성은 몸 깊숙이 각인되어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나는 과연 킬러의 본성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자신의 정체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냉혹하고 잔인한 킬러의 과거가 드러난다면 그 본질의 끝과 대면할 수 있을 것인가. 대면하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 나는 무얼 할 수 있을까. 외면하거나 은폐하고 싶지 않을까. 본능을 받아들여 다시 킬러의 길로 나서는 것도 가능하겠다. 하지만 그 본능과 맞서고 과거를 수습하기는 쉽지 않은 법.

첫 번째 영화 ‘본 아이덴티티’가 자신이 킬러였다는 사실을 깨닫는 과정과 그것을 죽음으로써 은폐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면, 두 번째 시리즈 ‘본 슈프리머시’는 연인의 죽음을 시점으로 잠시 유예시켰던 기억 되찾기의 여정을 다시 꾸림으로써 기억의 근원으로 깊숙이 들어간다. 그리고 그 여정의 대단원인 제3편 ‘본 얼티메이텀’은 기억 되찾기의 최후통첩이다. 3편으로 이어지는 동안 스케일은 더 커졌고, 볼거리도 많아졌고, 기법도 세련돼졌다. 폴 그린그래스 감독의 연출력도 한몫했다. 하지만 ‘본 얼티메이텀’에서 화려한 기술만 보았다면 아무것도 못 본 것이다.

‘본 얼티메이텀’은 당신에게 묻는다. 지금 당신이 잊어버린 당신의 본성은 무엇인가. 그것을 찾고 싶지는 않은가. 그 본능을 외면하건, 대적해 싸우건, 수습하건 그건 다음 문제다. 어차피 인생이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떠나는 끊임없는 여행이 아니겠는가.

소설이란 것도 그와 다르지 아니할 것. 이제 나는 출발한다. 망각과 각성, 그리고 존재의 시원. 깊고 어두운 물속으로.


천운영씨는 2000년 소설 ‘바늘’로 등단한 소설가로 장편소설 『잘가라, 서커스』, 단편집 『명랑』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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