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 '그 섬에 내가 있었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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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삶을 엿보는 건 무척 흥미로운 일이다. 그 사람이 카메라를 들고 평생을 살아온 사진작가라면 광기 어린 예술가의 혼을 기대할 수 있고, 혈혈단신 제주도에 틀어박힌 지 올해로 스무해째라면 그 독기와 집념을 시기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가 5년 전 의사가 시한부 선언을 내린 난치병을 앓고 있다면, 그의 인생은 도저한 감동의 이야기가 된다.

사진작가 김영갑(47)씨의 포토에세이 '그 섬에 내가 있었네'가 그러한 이야기다. 그는 섬에서의 20년을 일기를 써내려가듯 담담히 털어놓는다. 하지만 그 담담함이 읽는 이를 더 숙연케 한다. 오랜 세월의 고독을, 하루하루 옥죄오는 죽음의 공포를, 별 일 아니라는 듯 무덤덤한 어투로 전할 땐 외려 불편하고 감당키 벅차다.

에세이 곳곳에 끼워넣은 70여 장의 사진은 차라리 심란하다. 무참히 흔들리는 초점 없는 억새와 서러우리만치 푸른 해질녘 하늘은 그의 평탄치 않은 삶을 바라보는 듯하다. 단언컨대 그의 사진엔 관광지 제주의 풍광은 없다. 저자가 "그대가 보았다고 우기는, 겉으로 드러나는 오름의 부드러운 곡선이나 제법 풍만해 보이는 볼륨도 사실은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일갈할 수 있는 이유다.

책은 1부와 2부로 나뉜다. 1부에선 카메라 하나 달랑 메고 섬에 내려가 정착하는 과정을 담았다. 간첩으로 몰리고, 들판에서 당근으로 연명하며 제주의 찰나를 20여만 장의 필름에 담아온 세월. 그는 그 때를 "섬에 홀려 필름에 미쳐 살던 시절"이라고 부른다. 2부에선 5년전 '루 게릭 병'(근위축증) 판정을 받은 뒤부터 오늘까지를 적고 있다. 그러나 그는 되레 당당하다. 투병 와중에도, 아니 투병의 일환으로 남제주의 한 폐교를 빌려 자신의 사진 갤러리 '두모악'(한라산의 옛 이름)으로 꾸미기 시작한다. 30㎏ 가까이 체중이 빠진 뒤로 몸무게를 재지 않고, 낯설게 변해버린 얼굴이 싫어 더 이상 거울을 보지 않는다. 급기야 그는 "시한부 판정은 의사가 내린 것이지 나는 내린 적 없다"고 선언한다.

지난하고 고단한 일상에서도 묵묵히 희망을 전하는 그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나도 그 섬에 와있음을 알게 된다. 책에 실린 사진만으로도 소장할 만한 책이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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