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멋대로 자고 깨는 와인의 변덕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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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호 29면

필립 샤를로팽 파리조는 모던하고 세련된 부르고뉴 와인을 만드는 매우 인기 있는 생산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의 와인은 향기로운 과일 맛과 적당한 농후함, 그리고 고상함이 장점으로 우리 남매의 와인 저장고에도 파리조의 다양한 와인이 진열돼 있다.
그런 파리조의 ‘제브레 샹베르텡 V.V` 2002년산을 발매 직후인 2004년 가을에 마셨다. 위대한 빈티지 답게 풍부한 과일 맛이 가득하고 우아하며 고혹적인 와인이었다.

인상이 너무 좋았기 때문에 지난해 가을 손님이 찾아왔을 때 `이걸 대접하면 기뻐하겠지` 하는 마음으로 마개를 열었다. 이게 웬일인가. 이때 마신 `제브레 샹베르텡`은 2년 전에 마신 것과 완전히 다른 와인이었다. 과일 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고, 타닌의 뒷맛이 혀에 남으면서 차갑고 어두운 인상이라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니?”라고 와인에 묻고 싶을 정도로 심심한 맛이었다.

상한 것도 아닌데 ‘심심한 맛’으로 변했다…. 어쩌면 이것은 와인이 잠들어 있는 상태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경우 디캔팅을 두 번 해서 억지로 깨우는 방법도 있지만, 강제로 꾸역꾸역 깨운 와인은 사람이 그렇듯 별로 생기가 없다. 잠들어 있는 와인은 결국 그대로 재워두는 것이 상책이다.

이 일이 있은 뒤로 나는 2002년 부르고뉴를 한동안 ‘봉인’하기로 결정했다. 대신 마실 시기를 맞이한 90년대 후반 부르고뉴를 신나게 열었다. 1997년산은 10년이라는 숙성기간을 보낸 덕분에 다소 견고한 제브레의 일급 와인도 부드럽고 매끄러운 맛으로 변해 있었고, 약간 날카로운 느낌의 1999년산 부르고뉴 역시 타닌이 달콤하게 바뀌어 있었다.

2002년산 부르고뉴 와인의 봉인을 푼 것은 올해 여름이다. 젊은 와인은 대략 1년~1년 반의 주기로 자고 깨기를 반복한다기에 슬슬 깨어날 시기일 것 같아 시험 삼아 마셔본 것이다. 마개를 연 것은 비교적 단단한 뮈네레 지부르 ‘클로 드 부조’ 2002년산. 조심조심 마셔봤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생긋 웃고 있었다.

위대한 2002년 부르고뉴가 드디어 잠에서 깨어난 것이다. 우리는 기뻐서 잔뜩 사들인 2002년산 부르고뉴를 차례차례 열었다. 내년이면 다시 잠들어 버릴 거라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자꾸 마개를 열게 된다. 사실은 좀 더 숙성되기를 기다려야 하는데.

그러던 와중에 남동생과 작업을 하면서 프레데릭 에스모낭의 특급 와인 ‘샹베르텡’ 2001년산을 마셨다. 나폴레옹이 사랑했다는 이 특급 와인은 남성적인 맛이 특징인데, 어쩐지 펀치가 부족해서 허전했다. “작년에 마셨을 때는 참 맛있었는데…. 혹시 이거 잠들었나?”라고 갸우뚱하는 남동생. 2002년산이 깨어나니까 이번에는 2001년산이 겨울잠에 들어간 걸까? 이것 참 갈수록 태산이다.

이처럼 와인은 인생을 바꿔 놓을 정도로 심오하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매력을 지니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제멋대로에 속 썩이는 음료수이기도 하다.
번역 설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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