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빈 칼럼] 태극기 휘날리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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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뉴욕 센트럴 파크에 외국군이 주둔한다면 미국민이 수용하겠는가." 용산 미군기지 이전을 주장한 도널드 럼즈펠드 미 국방장관의 말이다. "일왕이 사는 황거(皇居)에 맥아더 사령부가 들어서 있다면 철거하지 않겠는가." YS정부 시절 옛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를 주장했던 정부 측 변이다.

일제 상징물인 총독부 건물을 걷어내고 경복궁 중건을 완성하면서 광화문 일대가 확연히 달라진 것은 사실이다. 또 임오군란 이후 외국군이 주둔해 왔던 용산에서 미군이 완전 철수하고 서울 센트럴 파크를 만든다면 이 얼마나 태극기 휘날리는 민족자존의 성과이겠는가.

*** 총독부 건물과 미군 용산기지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1995년 3.1절, 순국 선열유족과 각계대표가 모인 성대한 자리에서 옛 총독부건물 철거 선포식이 있었다. 그해 광복 50주년이 되는 8.15 날 총독부 건물 첨단 돔 부분이 해체되면서 이제야 민족정기가 바로 섰다며 온 국민이 환호했다.

중앙청과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해왔던 총독부 건물이 6개월 만에 일사천리로 해체에 들어가 버린 것이다. 수십만점 민족유산을 보관할 곳이 없어 임시 박물관을 날림으로 차리고 숱한 논란 끝에 지금껏 용산에 박물관을 짓고 있다. 당시 건물 철거 비용만 수백억원, 여기에 경복궁 복원에 새 박물관 신축비용을 합치면 가위 천문학적 예산이 필요했다.

소수지만 반대론자도 있었다. 치욕의 역사도 보존할 필요가 있다, 새 박물관을 짓고 나서 철거해도 늦지 않다, 민족정기 열풍에 휩쓸려 수천억원의 재화를 날리기보다 대일 무역적자 개선, 산업기술 예속화에서 벗어나는 것이 현실적으로 민족정기를 살리는 길이라고 나 역시 주장했지만 이는 한갓 반민족 친일세력으로 몰릴 뿐이었다.

최근 자주국방.자주외교 바람이 불고 있다. 용산기지의 평택 이전을 미국의 군사전략 변화에서 온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볼 측면도 있다. 그러나 지난 1년 한.미 간 용산기지 협상과정을 보면 사안이 그리 단순치 않다.

지난해 7월 미래 한.미동맹 3차 회의에선 2006년 말까지 이전 합의를 하면서 연합사와 유엔사는 그대로 잔류키로 했다. 그러다 11월 협상이 실패로 끝나면서 올해부터 3년 동안 전방의 미군 2사단이 의정부.동두천으로 합쳐지고 2007년 말까지 한미연합사.유엔사 등 미군기지 전체가 평택으로 빠져나가게 된 것이다.

왜 잔류에서 몽땅 이전으로 바뀌었는가. 용산기지에 28만평을 달라는 미국 측 주장과 17만평밖에 안 된다는 한국 측 주장이 맞섰기 때문이다. 11만평이 자주국방과 굴욕외교의 분기점이 됐다면 뭔가 크게 잘못된 것이다.

또 이 시점에서 외교부 내부의 대통령 비하발언이 문제됐고 친미노선의 외교부와 NSC의 반미.자주노선의 대결이라는 소리까지 나왔다. 마침내 외교부 장관까지 바꿔버렸다. 속사정이 어찌됐든 미군기지 이전 문제는 한.미 간 이런 감정적 대립과정을 거치면서 결론이 났는데도 이를 단순한 군사전략 변화라고만 볼 수 있는가.

한.미 간 감정의 앙금은 시간이 지나면 치유된다 치자. 문제의 핵심은 과연 미군이 이렇게 빠져도 휴전선에 이상이 없겠느냐는 불안이다. 미군을 인질 삼아 국방을 지키겠다는 인계철선 논리는 염치없는 주장이니 빼자. 그럼 미군 2사단이 3년 후 남하할 때 그 자리 방어는 누가 어떻게 지킬 것인가.

*** 무슨 수로 막대한 국방비 댈 건지

미 2사단은 서부지역 전방을 책임지고 있다. 5개 여단의 미 2사단은 전차 1백40여대, 브래들리 보병 전투차량 1백70여대, 아파치 헬기 40여대의 기갑전력에 팔라딘 자주포.다연장 로켓포 등 그 화력이 한국군 3개 기계화사단과 맞먹는다고 한다. 2사단 전력이 빠질 경우 막대한 국방예산이 소요될 수밖에 없다.

지난해 국방연구원 추산으로도 자주국방을 위해선 2010년까지 64조원이 든다고 했다. 북의 장사정포에 대응할 다연장 로켓포 발사차량 한대 값이 50억원, 신형 아파치 헬기 한대 값이 3백50억원이라면 무슨 수로 대응전력을 갖출 것인가. 막연한 안보 우려가 아니라 구체적 불안으로 다가서지 않는가. 과연 이런 전력보강까지 예측한 자주국방론인가. 용산기지 11만평을 내주고 국방비를 절감하는 게 더 지혜로운 동맹 외교가 아니었던가.

내 임기 중 민족정기를 바로세우고 내 재임 중 자주국방을 달성했다는 태극기 휘날리는 정치적 업적만을 내세우다 민족 유산 보존을 망각하고 국가안보를 소홀히 한 측면이 없는지 위정자는 깊이 깊이 숙고하기 바란다.

권영빈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