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삼칼럼>할아버지의 유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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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한 여론조사 기관이 65세이상 된 할아버지들에게 물었다.
「손자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딱 한가지만 고른다면」.
할아버지들이 무엇이라고 응답했을까.당신이라면 어떤 말을 해주고 싶은가.해답을 알기 전에 모두가 그런 질문을 받은 할아버지가 되어 한번 생각해보자.
놀랍게도(적어도 필자에게는)할아버지들이 으뜸으로 꼽은 것은「남을 사랑하라」는 말이었다.오래전 방송을 통해 들은 것이어서 세세한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으나「남을 사랑하라」는 말을 꼽은할아버지들이 60% 이상이나 됐다.그 다음으로 꼽힌 것은「정직하라」는 말이었다.
가슴에 잔잔한 감동이 이는 조사결과였다.이기주의가 모든 가치들을 압도하는 듯한 이 각박한 세상에 그래도 할아버지들이 손자들에게 가장 해주고 싶은 한마디 말은「남을 사랑하라」는 것이라니-.그리고 정직한 사람이 손해보는 세상이란 것쯤 은 누구나 경험하고 있는 오늘의 世態속에서 그래도 손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은「정직하라」라니-.
문득 이런 기억이 되살아난 것은 물론 아들이 상속을 노려 부모를 죽인 그 끔찍한 사건 때문이었다.이기심은 天倫마저도 저버리게하는가 라는 생각 끝에 불현듯 떠오른 것이 그 기억이었다.
愛他主義에 대한 믿음이 그 한가지 기초가 되었던 사회주의도 막상 국가체제를 형성한 뒤엔 특권계급과 부패,관료적 경직성과 생산의 비능률을 낳아 차례로 몰락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들은 결국 이기주의가 인간의 진짜 본성이며 숙명인 것인가 라는 생각에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인간의 또 하나의 天性이라고 주장되어온 愛他主義는 할아버지의「말」에서 한가닥 구원과 소생의 길을 발견한다.65세 이상의 나이라면 세상을 살만큼 산 나이다.또 65세 이상 연령층이 살아온 지난 세월은 각박하기 짝이 없는 나날 들이었다.그래도 그들이 유언처럼 손자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남을 사랑하라」였다면,그것도「정직하라」는 말보다 더 우선적으로 하고 싶은 말이었다면 우리들의 믿음은 회복돼도 좋은게 아닌가.
프랑스 태생의 생물학자 르네 듀보는 愛他主義가 인간의 생물학적 과거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역사 이래 인류는 愛他心을 그 이기적.동물적 본성을 초월하는 절대적 가치와 德으로 만들어 왔다며 실증적 사례를 들어가며 설명하고 있다 .그 예의 하나로 현 이라크의 샤니다르 동굴에선 5만년전쯤에 살았던 네안테르탈 성인 남자의 유골이 발견되었는데 그는 생전에 장님이었고한쪽 팔은 어릴 때 팔꿈치 위쪽에서 절단되었다.원시시대에 이런신체적 조건으로는 도저히 생존이 불 가능하다.그러나 그는 당시로선 수명의 上限線이라 할 40세까지 살다가 동굴이 무너져 壓死했다.이웃의 희생적 돌봄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었으리라는 것이 학자들의 추정이다.
생존경쟁은 국내적으로도,국제적으로도 갈수록 치열해지고 그에 따라 개인은 개인대로,국가는 국가대로 이기주의의 길로 치닫기 십상이다.뿐만 아니라 가정의 붕괴는 미래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21세기 미래像의 하나다.核가족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예 가정이란 개념 자체가 흔들릴 것이란 우울한 전망이다.본능의 뒷받침을 받는 이 최소단위의 愛他的공동체마저 해체의길로 접어들 때 인간사회의 미래상은 어떤 모습이 될 것인가.
***비관보다 희망많아 그러나 절망할 필요는 없다고 믿는다.
아직 우리는 그런 비관적 상태에는 이르지 않았다.희망은 할아버지들의 마음속에 여전히 살아숨쉬고 있다.따지고 보면 부모 살해의 패륜이 우리 사회에만 있는 현상도 아니다.그렇다고 이번 사건을 거울삼 아 우리 사회의 문제와 병폐를 반성하고 그 개선책을 찾는일까지 소홀히 하자는 말은 물론 아니다.다만 지나치게 비관에 잠길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르네 듀보는 인류사회의 진보가 우리들이 이기심을 누르고 애타심을 선택할 때 이룩되었다고 말한다.애타주의에 우리들의 미래가달렸다.또 그것은 분명히 우리들의 천성이다.할아버지의 유언아닌유언이 그것을 입증하고 있다.할아버지 만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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