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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 cover story] 철저한 여성 상위 무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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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 연기 7년차의 한석봉(예명)씨. 등장한 비디오물이 1백50여편에 주연만도 30회 이상이다.

극장 영화에 견주기는 좀 뭣하지만, 출연 실적만 놓고 보면 국민배우라는 안성기(70여편)씨 못지않다. 그러나 거리에서 한씨를 알아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의 말마따나 얼굴보다는 여배우의 나신을 덮은 자신의 '등짝'이 화면에 훨씬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 바닥에서 알아주는 '중견 연기자'인 그의 실정이 이렇다. 여배우의 벗은 몸으로 손님을 끄는 에로 업계에서 남자 배우들은 대체로 찬밥 신세여서다.

철저한 여성 상위=에로 비디오는 캐스팅부터 여주인공에게 휘둘린다. 데뷔 11년차인 박진위(예명.33)씨는 "감독이 마음에 드는 남자 배우를 쓰려 해도 여주인공이 싫다면 그만"이라고 말한다.

촬영 중에도 남자 배우들은 푸대접이다. "분명히 여배우 잘못으로 NG가 났는데도 감독님이 '남자 탓'이라고 할 땐 자존심이 상한다"는 게 한씨의 말이다.

이 같은 제작진의 과보호가 여배우 스스로 '귀하신 몸'으로 행세하는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에로 연기를 하려면 어쩔 수 없는데도 '몸에 함부로 손대지 말라'며 까탈스럽게 굴 땐 화가 난다."(한석봉) "술냄새를 펑펑 풍기는 데다 제대로 씻지도 않고 촬영에 임하는 여배우도 있다. 연기도 대사도 안 되면서 몸뚱이만 내세우는 여배우와 비디오를 찍을 땐 나도 같은 부류로 떨어지는 것 같아서…."(박진위)

촬영 후 받는 출연료 봉투는 이들을 더 초라하게 한다. 주연급 여배우는 일당이 60만~70만원이나 상대역 남자는 그 절반인 30만원 선이다.

이럴 때 더 서럽다="일본 남자 에로(포르노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배우는 촬영이 끝나니까 스포츠카를 몰고 골프치러 가더군요. 그런데 우린…." 박씨가 털어놓는 일본 현지 촬영 경험담이다. 같은 일을 하면서도 일본에서는 연기자로 인정받고 영화 스타 버금가는 수입을 올리더라며 부러워한다.

일본 배우와 자신을 비교해도 어깨가 처지지만, 그보다 더 이들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은 '에로 배우=포르노 배우'라는 국내의 인식이다. "포르노는 실제로 행위를 하는 것이고 에로는 영화.드라마와 마찬가지로 연기일 뿐"이라고 아무리 말해봐야 "그게 그거지 뭘"이라며 쯧쯧거리는 시선만 돌아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족과 아주 친한 친구 정도를 빼고는 자신이 에로 배우라는 사실을 숨기고 산다. 내놓고 인터넷 팬클럽까지 만드는 여배우들과는 영 딴판이다.

범람하는 인터넷 포르노에 밀려 에로 비디오 업계가 위축되는 것도 안타깝다고 한다. 한때는 한달에 서너편씩 찍었지만 요즘은 2~3일에 뚝딱 만드는 한편 출연이 고작이다. 최근 데뷔한 이가을(예명.24)씨는 "한달에 한편으로는 생활비도 충당이 안 돼 인터넷 성인 방송에도 출연하고 있다"고 말한다. 업계 선배인 한씨는 택시기사로, 박씨는 중소기업에서 일하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말 못할 고충. 박씨와 한씨는 "워낙 벗은 몸을 많이 보다 보니 실제 성(性)생활에 문제가 생긴다. 일종의 직업병인 셈"이라고 말했다.

리얼리티를 향한 갈증="집앞 골목에서 정사하는 장면인 데도 옷을 모두 벗어야 하고, 숫처녀가 첫 경험에서 오르가슴을 느끼는가 하면, 상대역 여성은 늘 욕정에 불타는 색녀로만 나옵니다."(박진위)

"감독님이 서커스에서나 가능한 엽기 체위를 요구하기도 합니다."(한석봉)

리얼리티가 떨어지는 대본이나 엉뚱한 주문을 받으면 쓴웃음만 나온다고. "대체로 누워 있을 뿐인 여배우들을 우리(남자 배우)가 연기로 리드해야 하는데, 괴상한 상황 설정에서는 자연스러운 연기를 이끌어낼 수 없다"는 설명이다. 영 아니다 싶으면 제작진에 얘기하지만, 대부분은 그냥 받아들인다고 한다. 스스로 택한 직업이니까, 다른 직장인들이라고 내키는 일만 골라 하는 것은 아닐 테니까. 이들에게 제작진은 가끔 곤혹스러운 일을 시키는 직장 상사이며, 상대 여배우는 보듬어야 할 직장 동료였다.

스타를 꿈꾸며=업계에서는 여배우에 치여서, 사회에서는 일종의 편견 때문에 대접받지 못하는 이들. 생계 때문에 다른 일을 하면서도 "본업은 배우"란다.

이 바닥의 최고가 되려는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한씨는 매일 외국 에로 영화를 보며 연기 공부를 하고, 박씨는 헬스클럽에서 터미네이터 같은 근육을 다듬는다. 이가을씨는 최근 트렌드인 '꽃미남 스타일'을 유지하기 위해 특히 피부와 체중 관리에 신경을 쓴다.'가을'이라는 여성스러운 예명을 붙인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조금씩 서광도 비친다. 박씨의 경우는 인터넷 팬 카페가 있다. 회원이 수백명 선으로, 수만명인 에로 여배우에게 비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여배우처럼 에로 비디오 제작업체가 '차려준' 것이 아니라 팬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것이라는 게 박씨의 자랑이다. 특이하게도 여성 회원보다 남성 회원이 많단다.

한씨는 "에로 비디오를 지배하는 것은 여배우지만, 여배우를 리드하는 것은 남자"라며 "언젠간 볕이 쨍쨍 내리쬘 날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택시 대신 스포츠카의 핸들을 잡는 날은 언제일까.

글=김필규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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