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팽과 함께 걷는 강변의 산책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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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한 친구가 얼마 전 유럽여행을 다녀와 귀국보고회를 갖겠다고 호들갑을 떠는 바람에 한사코 몸이 거부하는 맥주까지 먹어가며 그녀의 수다를 다 들어주어야만 했다. 평소 쇼팽의 열성 팬이었던 친구는 쇼팽과 관련된 유럽의 이곳저곳 이야기로 보고회의 절반을 채웠고, 나도 덩달아 쇼팽 전문가가 되는 듯 했다.
아마도 요즘 즐겨보는 <노다메 칸타빌레(동명의 일본 만화를 원작으로 한 드라마)>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노다메가 ‘마라도나 피아노 콩쿠르 2차 예선’에서 외워서 쳤던 쇼팽의 ‘에튜드 Op.10-4’. “소름이 끼칠 정도로 불타오를 것 같은 영혼의 에튜드”라는 극중 심사위원들의 평 덕분에 몇 번이고 재생 버튼을 눌러가며 드라마 속 연주를 다시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 목욕탕공원이 뭐야, 프랑스 사람들은 화장실공원이라고도 한데. 그게 말이 되니? 쇼팽의 동상이 그런 곳에 있어야 되냐구?”
친구는 18세기 후반 폴란드 최후의 왕(Stanisxaw Augustus Poniatowski)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와이쟁기공원(Park Lazienkowski)의 이름을 가지고 열변을 토했다. 쇼팽의 생가가 그 곳에 있었다거나 공원 이름의 유래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아마도 좀 더 근사한 곳에서 쇼팽의 동상을 보고 싶었기 때문일 게다.
쇼팽의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사실 그 곳이 조금은 초라해 보일 법하다. 가톨릭 국가인 폴란드에서는 낙태가 법으로 금지되어 있는데, 젊은 여성들이 아이를 낳고 비닐봉지에 담아 이 와이쟁기 공원에서 버리고 간다는 끔찍한 이야기는 그 초라함을 더욱 부추긴다. 쇼팽이 어린 시절 포플러 나무 아래에서 산책을 즐겼던 분위기는 이제 찾아보기 힘들지만, 여전히 와이쟁기공원은 관광객들에게는 명소이고 특히나 쇼팽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꼭 들러야 할 장소다.


“나의 창작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10시간의 연습보다 1시간의 산책이었다.” -쇼팽
피아노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였던 쇼팽은 네 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워 여덟 살 때 청중들 앞에서 기로베츠 협주곡을 연주했던 천재였다. 프랑스인 아버지와 폴란드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쇼팽은 20세까지는 모국인 폴란드에서 생활하다 생을 마감한 39세까지 19년간은 프랑스에서 살았다. 천재 음악가 쇼팽의 삶은 파리에서만 무려 9번씩이나 이사를 했을 만큼 궁핍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곡은 한없이 다채로운 색채와 세련된 시정이 넘쳐흘렀다.
후대에 ‘피아노의 시인’이라 불릴 만큼 하나같이 서정적이며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센티멘털한 정서가 곳곳에서 넘쳐나는 그의 작품들은 주로 산책을 통해 영감을 얻고 다듬어졌다고 한다. “창작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10시간의 연습보다 1시간의 산책”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산책을 즐겼던 그는 산책길에서 시상이 떠오르면 바로 집으로 돌아와 작품을 완성했다고 한다.


쇼팽이 사랑한 여인들 포토츠카, 마리아 보진스키
“쇼팽도 바보야. 좋아하면 좋다고 당당하게 말하지, 왜 말을 못하냔 말야. 그러고 보면 참 내성적인 사람이었던 것 같아.”
쇼팽의 창작과정에서 그의 연인들을 통한 영감은 빠뜨릴 수 없는 소재다.
같은 음학원에 다니던 동갑내기 친구 콘스탄티아 글라드코프스카하고 사랑이 이루어지기만 했어도 그렇게 빨리 죽지는 않았을 거라는 게 친구의 이야기다. 쇼팽이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갖기를 원했을 만큼 사랑했던 매혹적인 연인 포토츠카와 생이별한 후, 드레스덴에서 만나 사귀게 된 9살 연하의 알토가수 마리아 보진스키와의 약혼과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특히 쇼팽은 사랑하는 연인 마리아 보진스키와 저녁이 되면 엘바강을 산책하고, 가로수길을 걸으며 데이트를 즐겼다고 한다. 그들이 거닐었던 거리와 궁전의 모습, 미술관, 그리고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저녁 산책했다는 엘베강가….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그들의 사랑의 밀어를 엿듣는 기분이 들었다. 밤늦게까지 쇼팽의 피아노 소리가 들리고 마리아의 아름다운 알토 소리가 울렸을 행복한 커플의 하루하루가 상상이 된다.
“비록 집안의 반대로 결국 가정을 꾸리지 못하고 헤어지긴 했지만 이런 행복과 아픔이 없었다면 마리아의 집에서 연주했다던 왈츠곡 ‘Op.69-1<고별>’과 그 유명한 녹턴 내림e장조 ‘Op.69-2’ (‘잊어 버리기 위하여’라는 문구와 함께 마리아에게 보냈다고 함)가 어찌 탄생했겠니?”
“만약 쇼팽이 마리아하고 결혼했다면 더 위대한 곡들을 많이 만들었을지도 몰라. 서른아홉이 아니라 여든아홉까지도 살지 않았을까? 마리아의 아버지가 죽인 거라니까. 세계적인 위대한 음악가를 죽게 한 장본인이라고. 너희들도 나중에 애들 시집 장가보낼 때 잘해 응. 엘베강이 왜 거기 있었겠어. 마리아와 쇼팽을 위해 있었던 거 아냐? 그놈의 기침병이 왜 생겼겠어.”
“……”
“아니다. 내 아이라도 그랬을 거야. 재산이 있나, 집안이 좋나. 기침이나 해대고 먼지 싫다고 입이나 막고 다니는 나약하고 병약한 놈, 여성스럽게 깔끔이나 떨고 앉았는데 아무리 피아노의 천재고 세계적인 작곡가면 뭐해. 사랑의 전력이 있는 병적인 사랑관을 가진 놈이라는 걸 안다면 딸 안 줄만도 하지,”


“그는 즉흥곡을 연주하는데 남다른 재질이 있었고, 한 곡의 선율이 머릿속에 떠오르게 되면 산책을 하다가도 서둘러 돌아와 피아노 앞에 앉곤 했다. 조르쥬 상드-
마리아와 이별한 후, 운명적으로 만난 6살 연상의 여인 죠르쥬 상드. 그녀는 특이하게도 남장을 하고 엽연초를 피웠고, 이미 남편과 아이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혼을 한 후 사회 저명인사들과 무수한 연문을 뿌린 대단한 애정편력의 소유자였다. 건강악화로 쇼팽은 그녀와 함께 마요르타 섬으로 함께 요양을 떠났지만 전남편과의 아이들 양육문제로 결국 둘은 헤어지게 된다.
후세의 사람들은 상드를 ‘창작의 원천이라는 이유만으로 영혼을 갉아먹는 마약 같은 존재’ ‘과도한 색정과 독선으로 순수하고 순정적인 쇼팽의 생명력을 고갈시켜버린 잔혹한 여인’이라고 폄하하기도 한다.
목구멍이 꺼칠해지도록 공기가 탁한 카페에서 저녁 내내 친구의 쇼팽 강좌를 들은 탓에 헤어질 무렵에는 많이 피곤했다. 무거워진 머리도 식힐 겸 집 근처 강변을 걷기 시작했다. 어설픈 술기운 때문인지, 쇼팽의 격동적 삶을 웅변하던 친구의 쨍쨍한 목소리가 귓전에 남은 탓인지 내 옆으로 엘베강이 흐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리고 ‘사랑을 다시 한 번(To Love Again)’이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진 ‘쇼팽의 야상곡 작품 9번 Eb장조의 제2곡’의 감미로운 선율도 들리는 듯 했다.
혹시 아는가. 우리가 지금 걷고 있는 저녁 강변 산책길, 그 거리 어디에선가 음악을, 여인을, 그리고 산책을 사랑하는 제2의 쇼팽이 고뇌에 찬 머리를 식히고 있을지.

장치선 객원기자 charity19@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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