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눈물을 닦아주세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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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호 03면

사진=뉴시스

굳게 다잡았던 마음은 비행기를 타면서 허물어졌다. 남편이 죽었을 때도 울지 않았던 이수자(80) 여사는 비행기를 보고서야 한국행이 현실이라는 걸 깨닫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꼭 40년 전 쫓기듯 떠났던 한국이다. 간첩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남편 윤이상(작곡가ㆍ1917~95)과 함께였다. 2006년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동백림 사건’이 정치적으로 조작됐다고 발표했고, 이 여사는 지난달 통일부 장관으로부터 “유가족에게 사과한다”는 편지를 받고 한국행을 결심했다.

40년 만에 귀국한 故 윤이상 부인 이수자 여사

이 여사는 40년 동안 한국과 연락을 끊고 살았다. 그사이 친정 부모가 사망했고 부산에 살고 있는 여동생은 8년 전 스치듯 본 게 전부다. 여동생에게는 방한 하루 뒤인 11일에야 전화를 했다. “연락을 한들 무엇 하겠습니까. 간첩두목으로 몰려 쫓겨간 마당입니다. 서로 겨우겨우 살고 있으려니 생각했습니다.” 이 여사와 딸 윤정(57)씨의 말투에는 아직도 억센 경상남도 사투리가 섞여 있다.

베를린ㆍ평양을 오갔던 타지 생활 40년은 이 여사에게 “침묵 속에 살았던 날들”이었다. 2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고 베를린으로 돌아온 윤이상은 아침을 먹고 나면 바로 서재로 가 오후 7시까지 조용히 작품을 만들었다. 조명도 많이 밝히지 않은 집에서 외롭게 조국을 그리워하는 곡들을 써내려 갔다. 한국에서는 이러한 그의 작품을 모두 금지했지만 외국 음악인들은 “윤, 당신은 어떻게 과수원에서 과일 따듯 곡을 쓰느냐”며 놀라워했다고 한다.

1995년 윤이상의 장례식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윤이상을 ‘민족의 작곡가’로 떠받드는 북한에서는 조화 5개를 보내왔다. 이 여사는 ‘여보, 당신은 혼자서 몸만 돌아가세요’라고 마음속으로 말하며 이 조화를 돌려보냈다고 한다. 대한민국에서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한국 취재진만 문밖에 진을 쳤다. “대한민국 역사에 윤이상이 없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라며 기자들도 다 돌려보냈다. 기자들이 돌아간 자리에 누가 놔두었는지 모를 꽃다발이 하나 남았다. 이 여사는 “한국 정부가 외면할 때 얼굴 모를 한국 기자가 놓고 간 꽃다발 때문에 처음으로 울었다”고 기억했다.

수십 년 동안 역사적 질곡과 싸웠던 강한 작곡가 윤이상은 이 여사에게 자상하고 꼼꼼한 남편이었다. 1956년 먼저 독일로 떠난 윤이상은 아내에게 “오늘 베를린에서 열린 연주회에는 이러이러한 연주자가 나와 어떠어떠한 연주를 했다. 연주회장에는 전철을 타고 갔고 올 때는 걸어서 왔다”며 그날 입은 양복ㆍ넥타이의 색까지 써서 보냈다.
이 여사는 “대륙은 떨어져 있었지만 사랑은 그대로였다”고 말한다. 여든의 그를 투사로 변신시킨 것도 이 사랑이었다. “저는 평범한 가정주부라서 말을 잘 못합니다”라고 하지만 남편과 관련해서 입을 떼면 한국 사회의 아픈 곳을 찌르는 이야기들이 뚝뚝 떨어진다. “세계 각국에서 훌륭한 예술가라고 칭송해도 고향의 동포들에게 빨갱이로 낙인찍힌 이상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나쁜 인상을 좀 씻어주십시오.”

이번 한국 방문에서는 남편이 자신의 묏자리로 그토록 원했던 통영의 바다가 보이는 언덕을 홀로 둘러본다. 한국 달력이 없어서 쇠지 못했던 추석도 남편 없이 맞는다. 그는 “놀랍게 발전한 한국이 너무나 낯설지만 이제 기회가 될 때마다 오겠다”는 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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