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화타’ 蕭龍友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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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호 26면

1951년 중국 중앙문사관(中央文史館) 관원 시절의 샤오룽요. [김명호 제공]

1924년 12월 31일 중국혁명의 아버지 쑨원(孫文)이 베이징(北京)에 도착했다. 한 달 전 톈진(天津)에서부터 고열에 시달린 탓에 병색이 완연했다. 치료를 위해 독일병원(현 北京醫院)과 셰허의원(協和醫院) 부근인 베이징호텔(北京飯店)에 투숙했다. 왕진
온 독일인 의사가 간염(肝炎)이라고 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7>

10여 일을 치료했지만 호전은커녕 황달 기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고통스러워했다. 병상을 지키던 부인 쑹칭링(宋慶齡)은 중의(中醫, 한의사) 샤오룽유(蕭龍友)를 청하기로 했다. 미국 생활을 오래한 탓에 평소 중의를 신뢰하지 않았던 쑹칭링의 마지막 선택이었다.

수척해진 쑨원을 응시하던 샤오룽유(1870 ~1960)가 진맥을 시작했다. 간암(肝癌)이었다. 10년이 지났다고 단정했다. 쑨원이 의사 출신임을 아는 샤오는 진단 결과를 숨기지 않고 증세를 설명했다. 그간 옆에서 쑨원을 보아온 쑹칭링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영험한 묘약을 간청했고, 주위의 사람들도 처방을 요구했다. “선생의 간은 이미 굳어 버렸다. 그 어떤 탕약으로도 풀 수 없다.” 샤오는 비통한 어조로 단호히 거절했다.

1925년 1월 26일 쑨원은 셰허의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간이 나무처럼 굳어 있었다. 말기 간암이었다. 두 달 후 쑨원은 “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샤오룽유는 량치차오(梁啓超)와 친분이 두터웠다. X선을 찍은 량에게 신장염이라는 진단 결과가 나왔다. 의사들이 수술을 권했다. 량치차오를 진맥한 샤오는 대단한 병이 아니라며 수술을 못하게 했다. 독서와 강의를 중지하고, 잘 먹고 과로하지 않으면 저절로 완치된다고 했다. 량치차오는 “군인이 전쟁터에서 죽는 것처럼 학자는 강단에서 죽어야 한다”고 되받았다. 결국 누적된 과로를 이기지 못한 량치차오는 입원해 수술을 받았다. 의사가 병든 신장을 그대로 두고 멀쩡한 신장을 떼어내는 바람에 강단에서 죽으려던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의료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샤오룽유는 20세기 중국 최고의 명의(名醫)였다. 중의학과 서양의학의 결합을 주장했다. 베이징중의학원(北京中醫學院)도 그가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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