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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읽기] 버림받은 여성이여, 세상을 구원할지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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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태어나자마자 대왕마마는 모진 영을 내렸다. 가져다 버리라고. 세월이 흘러 한날 한시 대왕마마 내외가 큰 병에 들었다. 귀하게 키운 여섯 공주는 약을 찾으러 모험에 나서지 않았다. 버림 받았던 바리데기가 길을 떠났다.

 돈 벌어 대학생이 되려 강화에서 부산까지 짐가방을 끌고 내려왔다. 시다생활도 했고, 아이스크림 장사도 했고, 신문 배달과 우유배달도 했다. 시내버스 안내양이 되어 몸수색을 당하는 수모도 겪었다. 무슨 일을 하든 시키는 대로 하고, 곱배기 철야도 했다. 그러다 남자들이 하는 일이라 돈 많이 벌 줄 알고 용접공이 되어 배 만드는 현장에 발을 디뎠다.

 무간지옥이었다. 용접불똥을 뒤집어 쓰는 것은 예사였다. 한여름에는 손톱밑까지 땀띠가 박혔다. 죽음과 산재사고에서 한순간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날도 사고가 일어나 한 생명이 참혹하게 죽었건만,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했다. 억울한 일 풀어주려 노동조합 대의원에 출마하라는 권유를 받아들였다. 그리고나서는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다. 해고되었고, “많이 맞았다. 수 천대도 더 맞았고, 수 백번도 더 짓밟혔다”. 복직문제로 싸우다 제3자 개입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노동운동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자본의 횡포에 짓눌린, 일하는 사람들과 함께 했다. 민주노총이라는 게 자랑스럽다 말하지만,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를 풀어내지 못한 것에 큰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소금꽃 나무』(후마니타스)에 기록된 김진숙의 삶이다.

 그 때 아버지가 가족을 버렸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 전쟁통에 여수에서 돌산으로 피란 갔을 적이다. 어린 시절, 두 번이나 성폭행을 당했고, 원치 않은 임신을 했을 적에는 끔직한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서울로 올라와 버스차장, 책 외판원, 구두닦이를 전전했다. 열심히 일하다 보면 어둡고 답답한 과거를 떨쳐낼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부녀보호소에 들어갔다 몸 파는 여인들과 인연을 맺었더랬다. 그것이 올무가 되고 말았다. 동두천에서 송탄으로, 송탄에서 군산으로 전전하며 이른바 ‘양공주’로 살았다.

 군산의 아메리카 타운에서 여섯 명의 동료들이 죽어나갔다. 엎드려 기도하려 했으나 어떻게 하는지 몰랐다. 그 때 터져나온 말이 “나는 살고 싶다!” 였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오랜 세월 몸부림치며 치달아온 길을 누군가에게 용서해 달라고 매달리고 싶었다.” 이제 신의 자비만이 수렁에서 자신을 건져 올릴 수 있음을 깨달았다. 신학을 공부하기로 마음먹었고, 1991년 마침내 전도사가 되었다.

 기지촌으로 돌아왔다. 그녀들의 상처받은 삶을 위안해주고, 이 세상을 향해 악을 쓰고 싶어서였다. “목이 졸리고 입이 막혀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죽어간 여자들, 그들이 못다 한 말, 하루 앞을 내다보기 힘든 기지촌 여자들의 말, 자라면서 더 주눅드는 기지촌 아이들의 말을” 대신 전하고 싶은 것이다. 『아메리카 타운 왕언니 죽기 오분 전까지 악을 쓰다』(삼인)에 실려 있는 김연자의 삶이다.

 바리데기가 돌아왔건만 대왕부부는 이미 승하했다. 가던 상여 멈춰 세우고 품에서 약수와 꽃을 꺼내 뿌리니 기지개를 켜며 깨어났다. 버림받은 자가 세상을 구원하는 법이다. 우리시대의 진정한 바리데기가 누구인지 두 권의 책이 귀띔해준다.

이권우<도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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