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 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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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승규는 다행히 엄마가 아버지에게는 비밀로 해줬기 때문에 터지지는 않았다고 했다.영석이는 밤늦게 아버지에게 공원으로 끌려나가서『같은 남자끼리 툭 터놓고 말하자』고 해서 곤욕을 치렀는데,그건 영석이 엄마가 「이 징그러운 문제」를 아버 지에게 떠넘겼기 때문이었다.
『우리 달수 엄마가 걱정 안해도 되는 거지?』 우리집은 엄마가 밤에 사과와 커피를 갖다주면서 그런 게 전부였다.그래서 나는 고개만 끄떡거렸는데 속으로는 엄마한테 무지 미안했다.어쨌든우리가 앞으로 다른 말썽만 일으키지 않으면 내신성적에는 영향이없게 해주겠다는 교장선생님의 말 씀이 엄마들을 일단 한숨 돌리게 만들어준 것 같았다.
상원이가 맨 마지막에 인상을 쓰면서 그랬다.
『울 엄만 그냥 잠도 안자고 울기만 하는 거야.미치겠더라구.
』 우리 학년 계집애들이 이번 사고이후에 우리 악동들을 대하는태도에 비한다면 어쨌든 선생님들이나 엄마들의 태도는 오히려 관대한 편이었다.정말이지 이건 바람피우다 현장에서 발각된 서방에게도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경멸하는 시선을 보내지 는 못할 거였다.계집애들은 우리를 용서해주지 않았다.우리를 마치 역적 대하듯이,무슨 더러운 벌레 보듯이 굴었다.
「꽃밭에 살면서 복에 겨운 것도 모르고 뭐가 부족해서 썰렁한잡초밭을 기웃거리니.학교의 명예를 위해서 사내답게 자살해줘.너희들은 꼴뚜기야」.
누군가 기도실 문 밑으로 밀어넣고 간 쪽지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써니네 애들이 다니는 은단여고와 우리학교계집애들은 앙숙이었다.우리학교 계집애들은 우리가 하필이면 은단여고 계집애들과 놀아났다는 데에서 특히 자존심을 상한 모양이었다. 우리학교는 한반에 여학생이 서른서너명에 남자는 열다섯명씩이었다.교육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남녀가 반반씩이면 여학생들이눌리기 때문에 이렇게 알맞게 남녀 비율를 정한 거라고 했다.꽃밭이니,복에 겨워서니 하는건 이런 수적인 상황을 말 하는 거였다. 그렇지만 계집애들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인종이었다.수적으로만 본다면 남자 하나에 여자 둘씩 정도가 돌아가는 상황이니까 그렇게 적당히 안배되어서 사이좋게 지내면 아무 문제가 없을거였다.그런데 그게 아니었다.이상하게 두세 녀석한테 만 대부분의 계집애들이 한꺼번에 몰리는 거였다.그리고 나머지 다른 놈들은 거의 다 찬밥 신세였다.그러니 꽃밭이니 복에 겨워서 어쩌구하는 건 말짱 사기치는 짓이었다.
「꽃밭 속에 꽃들이 한송이도 없네」.
우리는 김민기의 노래가사를 인용해서 백지에 크게 쓴 걸 기도실 문밖에 붙여 놓았다.
상원이는 계집애들을 더 자극해서 뭐하냐고 반대했지만 다수결에밀리고 말았다.써니네 애들과의 스캔들 때문에 가장 힘들어하는게상원이라는 걸 우리는 다 알고 있었다.정화가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겠느냐는 거였다.그렇지만 우리는 또 알고 있었다.정화는 어차피 상원이를 하나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기도실에 쪽지 하나가 더 들어왔는데,지선이가 방과 후에 승규를 만나자고 콜하는 내용이었다.다음날 들으니,지선이가 울면서 그랬다는 거였다.
『말해줘.은단 애들하고 그랬다는 거.…난 어떡하라는 거니.』지선이가 승규를 좋아한다는 건 우리도 다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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