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봉투 4만개 투표 이틀 전에 뿌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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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10만 경찰을 호령하던 경찰총수였습니다. 그랬던 내가 표를 달라고 야밤에 골목마다 돈봉투를 뿌렸으니… 지금도 그 일을 생각하면 얼굴이 붉어집니다."

정치개혁이 시대의 화두가 돼 버린 요즘, 한나라당 유흥수(柳興洙.4선.부산 수영)의원이 27일 중앙일보에 자신의 부끄러운 '돈선거의 추억'을 털어놓았다. "17대에 나가면 또 돈을 뿌려야 합니다. 지금까지 다섯번 선거를 치르면서 돈을 돌리니 당원들이 나를 돈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나도 당원들이 돈으로 보입디다."

현직 의원이 자신의 돈선거 치부를 드러내기는 56년 의정 사상 처음이다. 그는 "'1백명 당선무효라도 각오하자'는 중앙일보 정치개혁 시리즈를 읽었다"며 "무슨 일이 있어도 17대부터는 이를 실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부끄러운 기억을 털어놓은 이유다. 柳의원은 5공 때 치안본부장(1980~82)과 충남지사.대통령 정무2수석을 지낸 뒤 85년 12대 총선으로 정치를 시작했다. 그는 이번 4.15총선엔 출마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85년 지역구에 내려가니 주위에서 '돈봉투를 뿌려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영세민들에겐 즉효라나요. 1만원권이 든 봉투 4만개를 준비했어요."

85년 전두환 대통령의 민정당은 위기를 느꼈다. 정통 야당 신한민주당의 돌풍이 거셌다. 민정당은 후보들에게 돈벼락을 안겼다. 청와대 수석 출신인 柳후보는 1급 지원 대상이었다.

"지역구 아파트에서 가까운 사람들이 모여 봉투에 돈을 넣었어요. 아내가 서울에서 여고동창을 불러 내렸어요."

아내 친구의 남편은 柳의원의 학교 선배다. 柳의원은 지금도 그들과는 부부끼리 친하다고 했다.

"요즘도 아내 친구를 보면 얼굴이 화끈거려요. '봉투에 돈을 넣으며 그녀가 나를 어떻게 느꼈을까'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죠."

柳후보는 2인1조로 돈봉투 배급조를 짰다고 한다. 한 명은 달동네 골목길 사정을 잘 아는 당원이었다. 그는 봉투를 넣어서는 안 될 '야당 집'을 잘 알았다. 다른 한 명은 친척이나 친지였다. 당원이 돈봉투를 빼돌리지는 않는지 감시하는 사람이었다. 봉투엔 아무 이름도 적지 않았다.

柳씨는 "후보 이름을 적으면 말썽날 우려가 있죠. 봉투라면 으레 여당인 줄 아니까 이름을 안 적어도 문제 없다고들 하더라고요"라고 했다.

4년 뒤 13대에서도 당직자들은 돈을 뿌려야 한다고 했다. 柳의원은 유권자에게 직접 돈봉투를 주는 것만은 안 하겠다고 했다. 그는 약 1만5천표 차로 떨어졌다. 그는 "봉투를 돌렸으면 표차를 줄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16대까지 돈봉투는 뿌리지 않았지만 돈선거는 계속됐다. 柳의원은 "당원들에게 주는 활동비, 지역구 유력자들에게 주는 뭉칫돈, 종교단체.노인정.지역모임에 갖다 주는 돈… 모든 게 불법 돈잔치였다"고 회고했다.

김진 정치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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