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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개혁 할 수 있다] 3. 정치 신인 진입 장벽을 없애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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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총선을 통해 국회에 진입하려는 정치 신인과 현역의원의 불공정 경쟁을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표현이다. 현역의원들은 후원회를 열어 선거자금을 조달하고 하루에도 몇 차례씩 의정보고회를 열어 사실상 제한 없는 선거운동을 하고 있지만 선거법.정치자금법에 손발이 묶인 신인들은 이름 석자조차 제대로 알리지 못해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달리 방도가 없으니 몸으로라도 때워야지요." 서울 노원을에서 출마를 준비 중인 권영진(한나라당)씨. 그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새벽 인근 불암산에 오른다. 등산을 마치면 조기축구회로 달려간다. 몸을 부딪치며 함께 공을 찬다. 유권자들을 조금이라도 더 만나 얼굴을 알리려는 고육책이다.

그러나 유권자들을 만난 그에게 허용된 말은 고작 "안녕하세요, 권영진입니다"뿐이다. '선거'나 '출마'란 말을 입에 올렸다간 선거법 위반으로 경을 치게 된다. 權씨는 "현역의원들은 '차떼기'로 의정보고서를 돌리며 사실상 선거운동을 하는데 정치 신인들은 명함에 자기 이력도 적지 못하니 어떻게 경쟁이 되겠느냐"고 하소연했다.

또 다른 서울지역에 도전장을 내민 S씨. 그는 연초에 가슴이 콩닥거리는 불안감을 겨우 달래며 자신의 이력을 적은 연하장을 유권자들에게 돌렸다. 정치 신인이 자신의 출신학교나 경력 등을 적은 연하장이나 명함을 돌리는 것은 현행 선거법상 불법이기 때문이다. 그는 "불법인 줄은 알지만 나도 어떻게든 날 알려야 할 것 아니냐"고 했다.

이번 총선에 도전장을 내민 정치 신인들의 상황은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기성 정치권의 거대한 기득권 벽 앞에서 절망하고 때론 살아남기 위해 불.탈법의 유혹에 빠져들기도 한다.

현역의원에게는 사실상 무제한의 선거운동이 보장되지만 신인들의 손과 발이 묶인 것은 선거법의 모순 때문이다. 지금의 선거법으로는 도저히 신인들이 현역과 공정경쟁을 할 수가 없다. 이 같은 불공정 경쟁은 올해 총선 화두인 '물갈이'를 근본적으로 제약하고 있다.

신인들이 자유로이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은 17일간의 공식 선거기간뿐이다. 그 전에는 자기 이름이 들어간 사무실도 못 내고, 후원회도 할 수 없다. '출마한다'는 말만 꺼내도 그 즉시 불법이 된다.

현재의 직책이 적힌 명함을 나눠주는 것만이 가능할 뿐이다. 고육지책으로 있지도 않은 단체나 조직을 만들어 명함에 박기도 한다. 반면 현역의원은 의정활동 보고라며 수만부씩의 홍보물을 뿌리고 있다. 의정보고회를 열어 노골적인 자기 홍보도 하고 3천원 한도 내에서 다과도 베풀 수 있다.

공식 행사에 가면 늘 소개도 받고 연설도 한다. 물론 정치 신인들은 연설은커녕 소개받기도 하늘의 별 따기다. 경기도 오산 출마를 준비 중인 열린우리당 최민화씨는 "시장의 순시 때 현역의원만 소개를 하는 바람에 그냥 따라다닐 수밖에 없었다"고 전했다.

자신을 알릴 기회를 원천적으로 차단당한 일부 신인들은 최근 "현역의원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현행 선거법은 위헌"이라며 헌법소원을 내기도 했다.

그런데도 여야는 선거를 코앞에 두고서도 이런 모순덩어리 선거법을 아직 고치지 않고 있다. 2월 국회에서 선거법을 고친다 해도 그때는 벌써 각 당이 공천을 위한 경선과 여론조사를 할 시기다. "손발을 다 묶어놓고는 여론조사니 경선이니 해서야 신인들이 어떻게 살아남겠느냐"는 게 정치 신인들의 불만이다.

상황이 이러니 일부 신인들은 무리하게 자신을 알리려다 선관위에 적발돼 고초를 겪기 일쑤다. 경기도에서 출마하려는 J씨는 지난해 말 연하장 1만8천장을 제작, 당원과 유권자들에게 돌렸다가 선거법 위반 혐의로 선관위로부터 고발당했다.

정치자금 조달도 신인들에겐 넘기 힘든 벽이다. 현행법상 정치 신인에게는 후원회가 허용되지 않는다. 정치권이 정치 신인에게도 후원회를 허용하기로 합의했으나 아직까지 정치자금법을 개정하지 못하고 있다.

한 후보자는 "퇴직금에 은행빚은 기본이고, 얼굴에 철판 깔고 친척.동문들에게 손을 벌린다"며 "갈수록 기성 정치인의 선거행태를 따라하는 것 같아 자괴감까지 든다"고 했다.

◆ 특별취재팀=김교준.이하경 논설위원, 강민석.강갑생 정치부 기자, 정선구 산업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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