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간다>85.그리스 아테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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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전날 오후5시 크레타섬의 이라클리온항을 출발한 대형여객선 크노소스호가 피레우스항에 도착했다.피레우스는 아테네의 외항.그래서인지 항구에는 대형선박들이 즐비하다.
오전7시 짐을 챙긴 다음 역으로 향했다.아테네로 가기 위해서였다.출근을 서두르는 사람들로 역은 몹시 붐볐다.역에는 표파는사람도,검표하는 사람도 없다.아직 역무원들의 근무시간이 되지않아 모든 사람들이 표없이 전철에 오르고 있었다.
나도 무료의 대열에 끼었다.
아테네의 중심가인 오모니아역에서 내렸다.8시쯤 되어서 일단 가까운 레스토랑에서 빵과 우유로 요기하고선 호주머니 수준에 맞는 호텔을 찾아 짐을 풀었다.가벼운 차림이 되어 아테네여행에 나섰다. 먼저 찾아야 할 곳은 아크로폴리스.그곳은 아테네의 역사,아니 서구문명의 원형질이 아로새겨져 있을 뿐만 아니라 아테네시를 조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높은 성소(聖所)라는 뜻의 아크로폴리스는 오모니아에서도 보였다.그래서 그곳을 향해 걷 기로했다.시내구경도 하면서.아크로폴리스의 정문은 플레문.그곳에서부터 계단이 가파르게 시작되고 있었다.승리의 여신 아테나 나이키를 모신 신전을 지나 계속 계단을 밟고 안으로 들어갔다.드디어파르테논이 나타났다.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갑자기 눈을 뜰 수가 없었다.하얀 대리석기둥들이 마구 햇빛을반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여인의 속살을 훔쳐보는 것도 아닌데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파르테논은 그만큼 범접하기 어려운 대상이었다.
파르테논,그것은 처녀신 아테나(아테네란 이름은 여기서 유래)에게 바치기 위해 세워진 신전이 아니던가.돌을 다듬어 여체처럼빚어낸 기둥과 이들과 연결된 벽체,그리고 삼각형 처마로 구성된파르테논은 아크로폴리스의 한가운데 주인처럼 버 티고 서 있었다. 파르테논 건축이 보여주는 간결함과 정확성,그리고 균형과 조화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남긴 유산이었다.그러나 이 유산은 오랫동안 서양인들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해왔다.고대 그리스인들이 파르테논을 통해 형상화하고자 했던 가치와 사고방식이 바로 헬레니즘이다.그래서 파르테논이 있는 아크로폴리스를 서구문명의 심장이라 일컫는 것이다.
그러나 파르테논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온 정성과 지혜를 짜내 만든 당시 모습을 제대로 간직하고 있지 못해 안타까웠다.17세기 그리스의 지배자 투르크와 싸웠던 베네치아군이 쏜 대포 한방이 파르테논의 지붕과 벽체 한쪽을 무너뜨렸기 때문 이다.
육중한 대리석 건물과 이들을 장식하기위한 조각들로 가득찬 아크로폴리스는 길이가 3백30m,폭1백70m,해발1백56m의 작은 언덕이었다.3면은 깎아지른 절벽이고 나머지 한면은 비스듬한경사로 플레문은 경사면에 있는 것이었다.
고대(高台)에 서서 아테네시를 내려다 본다.둘러보아도 고층건물은 보이지 않는다.멀리 남쪽으로는 포도주빛 에게바다가,성벽 바로 아래로는 야외음악당 헤로데스 아티쿠스가 눈에 들어왔다.그옆으로는 또 하나의 야외극장 디오니소스가 있었다 .헤로데스 아티쿠스보다 컸으나 망가진 부분은 오히려 많았다.정오쯤 아크로폴리스에서 내려와 아고라를 찾았다.아고라란 시장이자 광장이었던 곳으로 고대 아테네의 정치.종교 재판.연극.음악등의 시설들이 집중되어 정치가나 학자.예술가들의 발 길이 끊이지 않았던 곳이다.이런「열린 공간」이 있어 아테네는 직접민주주의를 꽃피울 수있었다.지금도 그 당시의 전망대.회의장.제단.체육관.음악당.시청사.재판소 등의 건물들이 더러는 제모습을,더러는 흔적만을 남겨 놓아 그때를 상상할수 있게 해주었다.
신타그마광장으로 향했다.신타그마란 헌법이란 뜻.1843년 그리스가 투르크로부터 독립하면서 이 광장에서 헌법을 반포했다고 해서 이런 이름을 얻었다.광장의 중앙에는 카페들이 가득차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이용되고 있었고 뒤쪽으로는 노란 색 3층 건물인 국회의사당이 위풍당당하게 버티고 서있어 마치 민주주의의 상징처럼 보였다.그 앞으론 왕실근위병들이 특이한 복장으로 보초를 서고 있었다.왕정이 사라진 지금 왕정의 유물인 왕실초병을 두고 있는 것은 왕정을 그리워해서가 아 니라 관광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자 함이었다.오후4시쯤 걸음을 재촉해 올림픽경기장으로 갔다.그 옛날 올림피아에서 개최됐던 올림픽 제전경기를 재현한 근대올림픽의 제1회 대회가 열렸던 곳이다.1백년전의 시설답지 않게 말끔했다.경기장 중앙에 휘날리는 올림픽기를 바라보면서 올림픽대회는 고대와 현대를 이어줄 뿐만 아니라 서양과 동양을 이어주는,아니 세계를 하나이게 하는 우정의 가교라고 생각했다.고대올림픽대회가 그리스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는 정치적.문화적 우월감을 안 겨줬던 이유를 조금은 알 것같다.
***“빛과 소리의 향연” 저녁나절 아크로폴리스 남쪽 프닉스언덕에서 펼쳐지는「빛과 소리의 향연」을 관람했다.그날의 무대이자 주인공인 아크로폴리스는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자신의 역사를 담담하게 읊조리고 있었다.갖가지 조명은 대사의 내용에 따라바뀌어갔다.객 석의 모두는 숨을 죽이고 1시간에 걸쳐 향연을 지켜보고 있었다.
밤깊은 오후10시 낯선 여행자의 행진은 계속돼 프닉스언덕 남쪽 필로파푸언덕으로 발길을 옮겼다.도라스트라토무용단의 그리스 민속공연을 즐기기 위해서였다.백색.홍색이 반반씩 섞인 그리스 민속의상을 걸친 선남선녀들이 현악기의 선율에 따라 빠르게 몸을움직였다.무언가 애수를 느끼게 했다.그것은 오랫동안 외세의 지배를 받았던 슬픈 역사의 소산이었다.
權三允〈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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