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다른 한국의 GAP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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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호 25면

오랜만에 명동에 나갔다. 새로 개장한 미국 중저가 브랜드 GAP(갭)의 매장을 들러보기 위해서다. 매장의 위치를 알기 위해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개장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수입사 대표가 말했단다. “국내 소비자 인지도가 이미 높아 광고홍보비가 적게 들 겁니다.” 맞는 소리다. 옥션과 동대문에서 두 배의 값을 쳐서 팔아도 금세 매진되던 브랜드가 GAP이다. 수입사 대표는 이렇게도 말했단다. “가격 대비 품질이 국내 경쟁 브랜드보다 앞섭니다.” 만약 그 ‘품질’이 디자인의 퀄리티를 포함한 단어라면야 당연히 그럴 만도 하다.

김도훈의 쇼퍼홀릭 다이어리

매장으로 들어섰다. 거추장스러운 영어 단어를 명동의 간판들처럼 노랗고 파란 원색 원단에 배설해 놓은 한국 중저가 브랜드의 특징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레이와 블랙의 간결한 디자인과 비교적 질 좋은 원단을 이용해 차르르 몸에 감기도록 만들어져 있는 옷들을 보고 있으려니 기분이 상쾌해졌다. 박리다매 중저가 브랜드에 대해 특별한 애정이 있는 편은 아니지만 해외여행이나 출장 때 습관처럼 GAP을 찾은 이유는 언제나 한가지였다. 간결한 디자인이 특색인 값싸고 실용적인 아이템을 구입하기 위해서다. 옷을 이리저리 들어 가격표를 체크했다. 촘촘하고 부드러운 면으로 짠 셔츠와 니트를 모두 합해 봐야 10만원이 조금 넘는 정도다. 이 정도면 한국에서는 충분히 합리적인 가격이다. 그러나 동행인은 짜증 섞인 신음을 토했다. “뭐야. GAP 가격이 뭐 이래. 너무 비싸잖아.”

그러고 보니 쇼핑 직전 미국 사이트에서 발견한 60달러짜리 재킷이 10만여 원에 판매되고 있다. 이쯤 되면 “본국 대비 190%의 가격이던 다른 수입 브랜드에 비해 미국 GAP의 130~140% 정도 가격으로 판매할 것”이라던 수입업체의 말을 의심해 볼 수밖에 없다. 게다가 매장의 인테리어가 GAP 치고는 지나치게 고급스러운 것도 감점이다. GAP의 매장이란, 아무런 부담 없이 들어가 19.99달러로 세일하는 예닐곱 벌의 옷을 탈의실 문짝에 걸레처럼 걸어놓고 입어본 뒤 딱 하나만 구입해도 아무런 부담이 없을 만한 장소라야 한다. GAP의 고급화라니, 누가 상상이나 했으랴. 물론 한 철만 지나면 생명이 다하는 옷들을 들이미는 한국의 중저가 브랜드에 비교하자면야 GAP의 디자인 대비 가격은 여전히 상냥하다.

마음에 드는 티셔츠를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들이닥치는 인파에 밀려 그냥 걸어 나왔다. 인파와 가격 때문만은 아니었다. 문제는 사이즈다. XXS부터 XXL까지, GAP은 한국 브랜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사이즈를 갖추고 있지만 나의 문제는 언제나 팔 길이였다. 미국인의 평균 체형에 맞춘 옷이라 어깨가 딱 맞아도 팔 길이가 감당하기 힘들었다. 만약 19.99달러나 29.99달러의 떨이 상품이 가득 진열된 진정한 GAP 매장이었다면야 아무거나 대여섯 벌 들고 나와도 마음에 한 점 부끄럼 없었을 테지만.

그래도 중저가 의류 선택의 자유는 여전히 넓다. GAP 매장을 떠나 향한 곳은 일본 중저가 브랜드 유니클로(Uniqlo)였다. 어깨가 좁고 팔도 짧은 아시아 체형이라면 유니클로는 진정한 사재기의 천국. 몸에 딱 붙는 간결한 니트 2벌을 겨우 3만원에 건졌다. 하지만 다음 주말 즈음에는 고민했던 6만원짜리 셔츠를 사기 위해 또다시 GAP 매장에 들를 것이 분명하다. 디자인에 대한 굳건한 신념도 없는 옷들을 판매원들의 쓸모 없는 아부를 견뎌가며 사야 했던 고통스러운 국산 중저가 쇼핑의 시대는, 적어도 나에게서는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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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훈씨는 글을 쓰고 여행을 하고 사진을 찍는, 그리고 그 모든 일을 하기 위해선 쇼핑이 꼭 필요하다고 믿는 ‘씨네21’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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