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 꽃송이로 피어나는 와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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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호 29면

로버트 파커 Jr.의 와인 평가에는 이따금 ‘90~93+’ 같은 폭(幅)이 있는 숫자가 기재돼 있다. 예전에 이 숫자를 처음 봤을 때는 참 이상한 평가방법이라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지만 와인을 어느 정도 알게 되면서 이 숫자 폭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파커의 평가는 우리 남매의 취향과 딱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이 방식을 와인 평가에 도입한 그의 감성은 역시 대단하다 싶다.

‘숫자의 폭’을 실감했던 에피소드 하나. 지난해 봄, 한 잡지 편집자와 일 문제로 만나기로 했다. 그가 “와인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고 해서 나는 마음먹고 최고의 와인을 레스토랑에 들고 갔다. 늘 그렇듯, 맛있는 와인을 맛보고 충격을 받은 그가 와인의 매력에 빠져들게 할 참이었다. 가져간 와인은 도메인 자크 프리외르의 ‘클로 드 부조’ 2002년산. 파커가 집필하는 와인 평가지 ‘와인 애드버케이트(wine advocate)’로부터 96~99점의 고득점을 받은 ‘꿈의 와인’이다.

아직 젊은 와인이라 단단하겠거니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부르고뉴니까 맛이 금세 열릴지도 모른다는 기대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전에 롤랑 루미에의 ‘클로 드 부조’를 발매 직후 마셨다가 꿈쩍도 하지 않는 단단함에 입을 다물었던 경험이 있으면서 또다시 같은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프리외르의 ‘클로 드 부조’를 한 모금 맛본 나는 그만 “단단해!” 라고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레스토랑의 주인이자 부르고뉴 전문가인 T도 “디캔팅 한 번만 가지고는 힘들겠는데요”라며 걱정했다. 우선 한 번 디캔팅을 해서 편집자에게 내밀었더니 그가 하는 말, “아주 진한 보르도 와인 같군요.” ‘맛이 별로 없다’는 눈치였다.

하지만 이 와인은 변화된 모습을 보여줄 것 같은 기미를 마구 발산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지금은 몸을 한껏 웅크리고 있지만, 이내 커다란 꽃송이를 소담스레 피워낼 것 같은 장미 꽃봉오리 같았다. 단지 고집스럽게 앙다물고 있어서 꽃의 크기와 색깔은 확실하게 알 수가 없다. 나는 “다른 가벼운 와인을 마시면서 잠시 기다려 보죠”라고 제안했다. 생테밀리옹의 위성지역에서 생산되는 부드러운 와인을 마시며 방치한 지 두 시간. 다시 마셔보니 마치 마법을 건 것처럼 꽃봉오리가 큼지막한 꽃을 활짝 피우고 있었다. ‘클로 드 부조’라는 테루아르의 특징인 검고 향긋한 흙냄새, 질 좋은 붉은 살코기, 스파이스, 그리고 장미향. 편집자도 “이것 참 맛있군요!”라며 놀라워했다.

이 와인에 매겨진 96~99점이라는 고득점에는 96점 수준의 아름다운 장미가 피어날 테지만, 그 꽃은 예상을 뛰어넘는 커다랗고 탐스러운 꽃송이일지도 모른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매기는 점수에 때때로 폭이 존재하는 것은 ‘꽃송이는 활짝 필 때까지 어떤 꽃이 될지 알 수 없다’는 의미가 숨겨져 있다. 즉, 천하의 파커도 와인의 모든 가능성을 파악할 수 없다는 얘기다. 와인은 미지의 존재다. 그 또한 와인이 가진 매력일 것이다.
번역 설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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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시음기-‘클로 드 부조’
단단하고 파워풀한 ‘피노 누아’

도메인 자크 프리외르(Domaine Jacques Prieur)는 부르고뉴 와인이지만 보르도 지역의 카베르네 쇼비뇽 베이스의 와인처럼 매우 단단하고 견고한 와인을 만들어낸다. 항상 손으로 수확해서 품질에 신경을 쓰며 연간 약 5000병의 와인을 생산한다.
얼마 전 ‘클로 드 부조’ 2002년산을 테이스팅했다. 역시 파워풀하고 단단한 느낌을 받았다. 짙은 루비 컬러가 꼭 멀로나 카베르네 쇼비뇽의 컬러처럼 진하다. 만약 색만 보고 와인을 판단한다면 아마 피노 누아라고 생각하기는 힘이 들 것이다.

향 역시 처음에는 매우 거칠고 투박한 느낌이다. 너무 강해서 디캔터 브리딩을 실시하였다. 피노 누아의 경우 디캔터에서 브리딩을 할 경우 섬세한 향기들이 날아가게 되므로 되도록 병에서 브리딩해 즐기는 것이 좋다. 하지만 어린 빈티지나 단단한 와인의 경우 디캔터에서 브리딩해도 된다.

디캔터에서 한 시간 정도의 브리딩을 하고 나니 와인이 많이 풀어진 모습을 보여준다. 허브·소나무·얼시·레더 등의 동물적인 느낌의 향과 라즈베리·블랙베리·카시스 등의 농축된 과일 캐릭터, 그리고 오크·타바코·플라워 캐릭터들이 잘 어우러져 복잡미묘한 향기를 뿜어낸다.

처음에는 매우 강한 캐릭터로 느껴졌지만 브리딩을 하면 할수록 향기가 부드러워진다. 이를테면 첫 모금에서는 화장을 진하게 하고 향수를 많이 뿌려 그다지 느낌이 좋지 않은 여자가 떠올랐다면, 시간이 흐를수록 나쁜 기분이 사라지며 본래 미모가 눈에 들어오는 여성이랄까. 피노 누아치고는 강한 타닌과 뒤를 받쳐주는 적절한 애시디티, 그리고 적절한 길이감을 주는 마무리가 잘 어우러져 좋은 밸런스를 보여준다. 특히 병을 따고 두 시간 뒤 테이스팅에서 느껴지는 타닌은 동글동글하게 잘 다듬어져 매우 인상적이었다.

다만 지금은 너무 어리고 단단하므로 최소한 2015년 이후 즐기시는 것이 좋을 듯하다. 아니면 디캔터에서 두 시간의 브리딩 이후 즐기시기를 바란다. 국내에 2002 빈티지는 수입되지 않았다. 필자는 앞으로 수입될 2005 빈티지를 추천하고 싶다.
이준혁(소믈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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