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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개혁 할 수 있다] 2. 투명화 안되면 기업은 또 '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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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선거철만 되면 기업 오너들의 외유가 늘어난다. 왜냐고…. 국회의원들을 피하기 위해서지."

최근 A그룹 전문경영인 K씨가 주위 사람들에게 실토한 말이다.

선거가 다가오면 안면 있는 정치인들에게 시달리기 때문에 해외로 도피한다는 것이다.

오다가다 한두번 얼굴만 스친 사람까지 손을 벌리는가 하면 은근히 협박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는 "한번은 회장님이 '국회의원을 아는 게 무섭다'고까지 하더라"고 씁쓸해했다.

총선 출마예정자들이 각종 사조직을 가동하며 유권자에게 펑펑 뿌리는 자금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다. 국고보조금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기업에서 나오는 것이다. 결국 돈선거.조직선거가 정치인과 유권자뿐 아니라 기업과 기업인까지 불법의 공범으로 몰고가고 있다.

이맘때쯤이면 총선자금을 준비하곤 했다는 B그룹 임원의 고백이다.

"그간 두 가지 종류의 정치자금을 내왔다. 하나는 전경련 차원에서 결정한 돈이다. 소위 그룹이라고 불리는 업체는 다 참여한다. 다른 하나는 그룹 오너가 개별적으로 정치인에게 주는 돈이다. 후자의 경우 의원이나 보좌관이 직접 찾아와 돈을 받아 가는 경우는 드물고, 양쪽을 잘 아는 브로커가 주로 낀다."

전경련 차원에서 정치자금을 갹출할 때는 불우이웃돕기나 수재의연금을 거두는 것처럼 할당제 방식이 적용된다고 한다.

이 경우 전경련은 각 그룹 핵심 임원들을 불러 회의를 해 액수를 결정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기업 입장에선 일종의 세금으로 간주하고 내는 준조세 성격의 돈이다. 대체로 매출 규모가 비슷한 그룹은 정치자금 규모도 비슷한 게 그동안의 관례였다. 그보다 규모가 크고 은밀한 돈은 기업 오너가 개별적으로 준비하는 돈이다. 대부분의 경우 분식회계를 통해 조성한 불법 비자금이 재원이라는 점이 공통점이다.

국세청이나 회계법인의 눈을 피해 기업이 수백억원대의 비자금을 조성하는 수법은 날로 교묘해지고 있다.

SK그룹과 현대그룹이 동원한 방법은 '은행 대출금 숨기기'다. 은행에서 대출받아 비자금으로 사용한 뒤 대출 사실을 숨기는 방법을 썼다. 이들 기업은 주로 본사가 지급보증을 서 중국이나 동남아 등지의 자회사를 이용해 현지은행에서 신용대출을 받아왔다. 수출입 과정에서의 이익을 국외법인에 떨어뜨리는 수법도 많다.

굴지의 대기업들이 해운회사나 상사를 하나씩 끼고 있는 이유도 비자금 조성용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모두 우리 기업의 대외 신인도를 멍들게 하는 사례다.

해외계좌를 이용하는 것은 기업뿐이 아니다.

고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의 경우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에게 2000년 1월 외화로 3천만달러를 송금한 뒤 2월 말 다시 총선자금이 더 필요하다고 해 2백억원을 준 사실이 드러난 바 있다. 鄭회장의 검찰자술서에 따르면 權전고문이 3천만달러를 요구할 당시 미국 시민권자인 김영완씨를 통해 해외 계좌번호가 적힌 쪽지를 갖고 와서 돈을 부탁했고, 鄭회장은 이 계좌로 돈을 보낸 것으로 나타났다.

불법 대선자금 수사를 지휘하고 있는 안대희 대검 중수부장은 "선거 때 한몫 챙겨 외국에 빌딩 사고, 자식들에게도 물려주고 그렇다는 소문이 있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심지어 공기업이나 중소기업까지 음성적 정치자금의 온상으로 지목된 게 사실이다. 역대 정권마다 해외에 입출금이 많은 가스공사 등의 자리가 요직 중 요직으로 꼽힌 것도 이런 이유에서라고 한다.

모 중소기업 오너는 "지역구 의원이 공장을 방문해 격려하고 싶다는 연락이 오면 성의(?)를 표시해야 한다"며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정치인이 손을 내밀면 어쩔 수 없다"고 고백했다.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의 한 전임 회장은 재임 중 국정감사장에서 국회의원들의 공격적 발언에 기분이 상해 의원들과의 저녁자리로 향하는 길에 "내 돈 안 받은 놈 있으면 나와봐"라고 고함을 쳤다는 웃지 못할 일화도 있다.

◆ 특별취재팀=김교준.이하경 논설위원, 강민석.강갑생 정치부 기자, 정선구 산업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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