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 북한 벌목공 처리/고민하는 정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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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국민정서나 인도적 견지선 망명허용 마땅/한­러관계 고려해 「현지정착」 가닥잡을듯
북한의 시베리아 벌목공 문제가 정부 대북정책의 새로운 관심사가 되고 있다.
러시아측이 『한국정부가 원하면 한국에 보낼 수 있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고 이에 따라 한국정부가 「망명불허」 방침을 변경할 조짐을 나타내자 북한측이 『그러면 납치로 간주하겠다』고 다시 공세를 취하고 나옴으로써 사태가 복잡하게 얽혀가는 형국이다.
문제는 우리 정부가 이 문제를 어떻게 다뤄나가느냐에 모아진다. 어떤 형태로든 정부의 기존 「망명 불허」 방침 재검토가 불가피해졌기 때문이다.
김영삼대통령은 지난 6일 『현재 90여명의 북한 벌목 인부가 우리의 주러시아 총영사관이나 대사관에 망명을 신청해놓고 있으나 북한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밝힌바 있는데 이들 「재조정」할지 여부도 관심거리다.
정부가 북한 벌목공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이유는 이 사안이 ▲국내법과 인권 ▲한­러시아관계 ▲남북관계 등 3중으로 복잡하게 꼬여있기 때문이다.
우선 국내법과 인권차원에서 보면 벌목공 망명은 정부의 「허용사안」이 아닌 「의무사안」이다.
헌법을 비롯,월남귀순동포보호법·월남귀순특례보상법 등에 따르면 북한 벌목공들은 「북한에 항거하여 귀순한 동포」에 해당된다.
따라서 정부로서는 이들의 안주와 생업을 도울 책무가 있다. 또 굳이 법을 따지지 않고 인도적 차원에서 보더라도 이들의 망명을 허용해야 한다.
외교안보연구원의 백진현교수는 『북한이라는 전제체제에 대항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자유와 인권』이라며 『탈북 동포에 정부가 최대한 적극적 자세를 취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문제는 벌목공 망명이 일반 국민들의 정서와 국내법만을 고려해 처리할 정도로 단순하지 않다는 점이다.
우선 이들의 망명허용은 당장 남북관계에 파장을 몰고올 가능성이 높다.
특히 지금같이 북핵문제가 현안으로 걸려있는 시기에 벌목공 망명허용은 바로 평양을 자극,극단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북한­러시아간의 「사법공조조약」도 문제다.
현재 러시아는 구 소련시절에 체결된 이 조약에 따라 북한을 탈출한 범죄인이나 밀입국자를 북측에 넘겨줘야 한다.
때문에 설사 벌목공이 탈주,우리에게 망명을 요청하더라도 북한이 범죄인이라고 주장하면 이들은 난민보다는 범죄인 차원에서 다뤄져 북한으로 송환될 수도 있다.
중국에 거주하는 북한 탈주자들과의 형평문제로 정부로서는 신경써야 할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는 기존 한­중관계는 물론 현재 미묘한 북경­평양관계에 새로운 파문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부가 이같은 현실을 핑계로 벌목공 문제를 지금처럼 엉거주춤한 상태로 마냥 내버려둘 수만도 없다.
이를 방치할 경우 김영삼정부가 표방하는 「인권외교」의 실체가 무엇이냐는 비판에 직면할 수 있다.
또 벌목공 문제는 북한주민의 대규모 난민화 현상의 초기단계라는 측면에서 정부가 언젠가 한번은 종합대책을 세워야 하는 숙제인 것도 사실이다.
이같은 「속사정」을 감안할 때 정부는 향후 떠들썩한 정면돌파 방식보다는 「조용한 처리」쪽으로 가닥을 잡아나갈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북한 벌목공 처리는 당장의 망명허용보다는 조사단 파견→실태조사→종합대책마련→러시아 현지 정착 유도라는 흐름에 따라 전개될 것으로 관측된다.<최원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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