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이쓰는가정이야기>딸애의 아빠사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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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올해 고1되는 딸아이가 사무실로 편지를 보냈다.서로 바빠 며칠씩 얼굴도 못보는 사이지만 그래도 전화도 있는데 왜 편지를 썼을까.얼른 겉봉을 뜯어보니 노트장 앞뒷면에 깨알같은 글씨들이소설처럼 빼곡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딸애의 투정은 단순한 것들이었다.무엇무엇을 새로 사달라,왜 학교에 한번도 안오느냐,나보다 오빠한테 더 관심이 큰 것 아니냐,왜 엄마한테 반말을 하느냐,누구 아빠는 담배를 끊었는데 아빠는 의지가 그리 약하냐는 따위였 다.
그런데 이것이 자기도 여고생이 됐다는 것인지 편지의 서론이「봄볕이 따스해졌다」느니「사무실서 밤샘을 하다가 건강을 해치면 어쩌냐」는둥 사뭇 감동적이었다.그러나 인사치레가 끝나자 이내 논조가 신랄해지더니 결국 또 포괄적인 공세로 돌아 서며「아빠가가정에 할애하는 시간이 하루 몇시간이나 되는지 한번 생각해 본적이 있느냐」가 하이라이트였다.나는 즉시 답장을 썼다.「아빠가몸에 해로운 담배를 피우면서 밤을 새우는게 다 누구를 위해서겠느냐.아빠는 이 세상 누구보다 너희 들을 사랑했다.술을 마시면서도 너희들을 잊어본 적이 없다….」 딸애한테서 또 편지가 왔다.나의 눈물겨운 애정고백에 대한 딸애의 답장은 이렇게 간략했다.「아주공갈 염소똥」.사무실 여직원이 어처구니없어 하는 내 얼굴과 딸애의 편지를 번갈아보며 우스워 죽겠단다.
한마디로 나는 어느새 크레디트를 상실한 것이다.마치 북한이 아무리 철석같은 약속을 하고 도장을 찍어도「저 사람들 며칠후 또 딴소리를 하면 어쩌지」하고 조마조마한 것처럼.딸애는 말로만같이 등산을 가고,말로만 같이 음악회를 가고,말 로만 같이 자장면을 먹는 아비와의 대화 테이블을 한마디로 치워버린 것이다.
하도 속이 상해 잔뜩 폭음을 했는데 다음날 이른 아침 딸애가 전화를 걸어왔다.너무 고맙게도『그래도 핏줄이니까 아빠를 사랑한다』는 것이다.『어이구 여우! 여우! 예쁜 우리 여우!』.북한이 계속 어린애같이 속을 끓여도 인내를 가지고 대화를 지속하기바란다.그들도 어쨌든 핏줄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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