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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나의 스탠드믹서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4호 25면

디데이 2007년 8월 31일. 미국에 나가 있던 오빠의 귀국이 다가옴에 따라 나는 작은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스탠드믹서를 장만해 보겠다는 야심 찬 계획이다. 가내수공업으로 빵 공장.과자 공장을 돌리는데, 때깔도 고운 키친에이드 스탠드믹서만 있으면 손반죽하느라 어깨 빠지는 일 없이 포커치아도 만들고, 베이글도 굽고, 각종 타트에 패스트리에, 아무튼 맛있고 몸에 나쁜 것들을 원없이 만들어 먹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몇 달 전부터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정은지의 쇼퍼홀릭 다이어리

그뿐인가? 액세서리만 더 사면 아이스크림이랑 파스타도 만들 수 있다. 이 좋은 물건을 아직 장만하지 않은 것은 국내외 가격 차이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찍어놓은 모델의 정가는 350달러지만 아마존에서 툭하면 40%씩 세일을 하니 요즘 환율로는 20만원 정도다. 하지만 개인 구매대행을 이용하면 33만원, 국내에서 220V로 승압한 것을 사면 물경 55만원에 이른다. 도대체 속이 쓰려 살 수가 없다. 무게가 15㎏에 육박해 미국 다녀오는 사람에게 부탁할 수도 없었는데 오빠네 이삿짐에 묻어온다면 괜찮을 것이다.

양해가 이루어지자마자 24시간 감시체제에 들어갔다. 그런데 이 성격에 감당 못할 흰색만 40% 세일이고 노리고 있는 베이비핑크나 크랜베리라든가 그럭저럭 괜찮은 엠파이어레드나 코발트레드는 쫀쫀하게 19% 세일에 그치는 것이다. 좀 있으면 하겠지, 기다리다 보니 어느새 7월! 어찌된 일인지 다른 색들이 세일에 들어가기는커녕 흰색까지 할인 폭이 줄어버렸다. 한국처럼 익일 배송 같은 것은 없는 미국이다. 늦어도 8월 15일까지는 도착해야 하는데 슬슬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도서관에서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했다. ‘오즈의 마법사’ ‘시민 케인’ ‘사운드 오브 뮤직’ 등 고전 영화의 스틸컷을 고양이 버전으로 바꿔 그린 화집이다. 집에 오자마자 아마존에 들어가 봤는데 마침 이 책이 80% 세일 중이다. 그래, 아마존에는 폭탄 세일이 있었지! 왜 이제야 기억해냈을까. 자책감에 휩싸인 나는 놀라운 지구력을 과시하며 수천 권의 세일서적을 몽땅 뒤졌다. 그래서 고른 게 모두 25권인데 예상 무게는 이번에도 15㎏이다. 이쯤 되니 스탠드믹서가 세일을 안 한 게 일종의 계시 내지는 징조처럼 느껴졌다.

주문을 마치고 모처럼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었지만 그래도 습관처럼 아마존에 들어가본 내 입에서 비명이 터져나온 것은 바로 다음날 아침이다. 스탠드믹서 코발트블루 색이 40% 세일에 들어간 것이다. 책 주문을 취소하자니 고르느라 고생한 게 원통하다. 추가 주문을 하자니 아무리 피붙이이지만 민폐에도 한계가 있다. 꼬박 48시간 고민한 끝에 스탠드믹서를 포기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래도 흐뭇한 것은 주문한 책의 상당수가 곧장 도로 가격이 올라갔다는 사실이다. 특히 장장 1584쪽에 이르는 정가 250달러짜리 옥스퍼드식음료대사전이 지금은 30% 할인에 불과해 내 구매가격의 세 배 이상이라는 것만 떠올리면 자다가도 웃음이 나온다. ‘롤링스톤스’지 39년간의 표지 모음집과 윌리엄 블레이크 수채화집과 파리장식예술박물관 소장 앤티크 장난감 사진집을 생각하면 당분간은 손반죽을 해도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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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지씨는 인터넷 쇼핑몰에서 일한 경험으로 쇼핑의 경제학에 관심을 갖게 된 자유기고가로 『모피를 입은 비너스』 『피의 책』 등을 번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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