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청와대비서실>166.후계자 노태우 발언에 혼쭐난 김윤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5면

친구끼리 권력을 주고받았다고 하지만 어쨌든 6공화국의 탄생은우리 헌정사에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임에 분명하다.
그렇지만 평화적 정권교체라 해서 대권을 주고받는 과정이 결코평탄했던 것만은 아니었다.권력이란 주고받는 짧은 순간조차도 나눠가질 수 없을 정도로 민감하고 까다로운 貴物이기 때문이다.대권을 주고받을 만큼 절친했던 전직 두 대통령이 권좌를 떠나 동네(연희동)이웃으로 돌아온 지금까지 서로를 외면하고 있는 것도바로 이같은 차가운 권력의 속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권좌에 있던 全斗煥대통령이 이런 권력 비정을 몰랐을리 없다.
물론 권좌에 있으면서 권력을 놓은후 자신의 운명이 백담사行으로까지 가리라고 생각지는 않았을 것이다.
강력한 대통령이고자 했던 그는 권좌의 최후까지 한방울의 누수도 없는 권력행사를 꾀했다.그를 측근에서 지켜본 5共 청와대 관계자 A씨는『그는 자신의 철저한 단임의지를 강조하고자 흔히「법정 임기 외에 하루 더도 덜도 안한다」고 말하곤 했다.이는 다시말해「임기중에는 1백% 권한을 행사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고 말한다.그러나 권력이동이 어느 한시점에 1백% 전부 옮겨가는 단절적인 행위일 수는 없다.全대통령의 퇴임후 계획과 관련,계산착오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全대통령은 집권과정에서 매우 거칠고 돌격적인 이미지를 주었지만 사실은 매우 세심하고 치밀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것이 그를 오래 지켜본 사람들의 지적이다.
A씨의 관찰 기억.
『흔히 全대통령이 앞만보고 달리는 우직한 스타일로 생각하는데그 반대다.밀어붙이는 추진력과 리더십이 대단한건 사실이지만 남모르게 혼자 메모해놓고 심사숙고하는 꼼꼼한 성격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대통령 집무실뿐 아니라 그는 어딜가든 재떨이에 재가 날리지 않게끔 휴지를 깔고 물을 부어놓도록 한다.그는 재떨이의 물깊이가 적당한지를 손톱으로 재보고 너무 물이 많거나 적으면 불호령을 내리기도하는 사람이다.이때문에 근접 경호원들 까지 늘 물깊이를 사전에 재본다.또 그는 매사를 비망록에 메모해두는 습관을 갖고 있다.중요한 내용은 녹음해 보관하기도 한다.
기록을 중요시하는 그이기에 취임과 함께 통치사료담당 비서관을 두어 대통령의 일거수 일투족,심지어 심경까지 기 록해두게 했던것이다.그리고 그는 이같은 기록의 상당부분을 퇴임후 가져갔으며,그 기록은 6共과의 관계에서 항상 공격용 폭탄 재료로 활용되고 있다.』 全대통령은 그같은 꼼꼼함을 바탕으로 나름대로 임기말 레임덕 현상(권력누수)을 막기위해 많은 고민과 숙고한 흔적을 남겼다.권력의 정상에 오른 사람은 누구나 정상에 오른 순간부터 주위를 의심의 눈초리로 내려다보게 마련이다.그것이 권력 의 속성이다.
이같은 최고 권력자의 권력 말기 심경은 全대통령 자신의 입을통해 확인된다.
全대통령은 임기말이 가까워오면서『권력은 잡기보다 내놓기가 더힘들다』는 얘기를 자주 입에 올렸다.마침내 87년10월2일 3사관학교 체육대회가 끝난뒤 軍관계자들을 격려하는 자리에서『내가7년간 최선을 다했지만 신이 아닌 이상 잘못된 분야도 많다.후임자가 그것을 시비하려 들면 얼마든지 정치보복을 할 수 있다』며 『나는 정치보복을 당할지 모른다는 각오를 하고 있다』고까지말했다. 全대통령의 권력누수방지장치에 철저히 동원된 총신은 역시 가장 믿음직한 부하 張世東이었다.張경호실장이 85년 2.12총선직후 안기부장으로 자리를 옮긴 것은 임기말 권력누수를 막겠다는 全대통령의 의지에 따른 것이었다.
張부장이 권력누수의 제1용의처로 견제해야할 대상은 바로 盧泰愚민정당 대표였다.盧대표는 2.12총선에서 전국구로 의원배지를달자마자 張안기부장 취임과 같은때 집권당대표로 취임했다.당의 영향력이 별로 크지도 않았고 全대통령 자신이 당 총재여서 특별히 경계해야할 대상은 아니었지만 5共권력구조의 성격으로 봐 盧대표는 張안기부장 다음으로 권력에 접근할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있었기 때문이다.
대통령과 안기부장의 2중 경계속에서 盧대표는 손에 잡힐듯 말듯한 후계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철저히 屈身했다.군문에 몸담고 있던 시절 항상 全대통령의 뒷자리를 따라다니며 권력을 지켜봐온그는 철저한 굴신만이 2인자의 처신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듯 했다.
이같은 경계와 굴신의 3각관계는 5共 후반부 권력구도의 한 기둥이었고 과도기적 권력의 긴장관계는 서로를 불편하게 만들었다.특히 엎드려 있어야 하는 盧대표의 입장이 그랬다.아무리 현실적 필요에서 자발적으로 수그린 몸이지만 全대통령이 나 張부장보다 훨씬 더 불편하지 않을수 없었다.
***안기부에서 監聽 누수방지업무를 맡은 張부장은 잠자는 시간외에는 全대통령을 王처럼 받들어 일만하는 충복이었다.그는 자신의 일에는 철저한 원칙주의자이기도 했다.그래서 盧대표쪽의 입장에서는『張이 대권에 욕심을 가지고 라이벌의 입장에서 견제한다』는 확신 을 가질만했다.
張부장의 盧대표에 대한 경계업무 수행태도가 얼마나 철저했는지를 짚을수 있는 일화 한토막.
86년 봄 해외공보관회의참석차 訪美중이던 당시 金潤煥공보처차관(현 民自黨의원)은 워싱턴의 한국특파원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화제는 자연스럽게 당시 국내정치의 핫이슈였던 개헌문제에서 차기대권문제로 넘어갔다.
한 기자가『도대체 여권에서는 다음에 누가 유력한 겁니까』라고물었다.全대통령의 퍼런 서슬에 당시만해도 여권인사로서 감히 이문제에 직설적으로 대답하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던 분위기였다.
그러나 이국만리라는 공간적 해방감 때문인듯 金차관은「私見」이라는 전제만 달고 즉답을 했다.기자출신으로 평소 허물없이 얘기를 털어놓는 성격인 金차관은 천기에 관한 문제까지 私見이라며 누설해버린 것이다.
『국민여론으로 보면 다음은 盧대표에게 가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지 않나.여권내에 다른 대안이 있나 뭐』.그리고 한마디 더 덧붙였다.『이제는 盧대표에 대한 홍보도 시작할 때가 되었지』.
金차관은 盧대표와 경북고동창으로 절친한 사이이며 盧대표가 다리를 놓아 5共신군부에 準핵심으로 가담했다.때문에 私見으로 그정도 얘기는 충분히 할수 있다고 생각했다.그러기에 참석한 기자들은「私見」이라는 그의 발언을 정색하고 기사화하지 는 않았다.
그런데 그중 연합통신 특파원이 본사로 기사를 전송하는 끝머리에「이런 얘기를 주고 받았음.여권분위기 변화로 참고하기 바람」이라는 메모를 타이핑해 보냈다.통신사의 기사는 본사로 전송되면 본사 데스크에서 다시 정리해 필요한 부 분만 외부로 송출하기 때문에 통신사 간부외 일반인들은 그같은 기사외 메모를 볼수 없다.그 메모는 안기부의 통신보안 감청에 체크되어 버렸다.
당장 안기부와 청와대에 경고사이렌이 불었다.한 관계자는『당시권력핵심부의 강경론자는 張부장과 許文道정무수석등이었다.그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도「盧대표 후계구도를 조기 가시화하기 위한 애드벌룬」이라며「불순한 의도를 경계해야한다」는 강 경론을 주장한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한다.
즉각「후계문제는 더이상 거론하지 말라」는 메시지가 긴급통신전문으로 미국의 金차관에게 날아갔다.전문뒤에 숨겨진 권력핵심부의심상찮은 분위기를 모르는 金차관은 일정을 마친뒤 귀국길에 올랐다. 金차관은 공항에서 비로소「뭔가 문제가 단단히 잘못됐구나」를 처음으로 깨달았다.공항에 도착해 트랩을 빠져나오자마자 건장한 장정들이 다가왔다.그중 연장자인듯한 사람이『안기부 수사과장입니다』고 자기 소개를 한뒤『남의 눈도 있고 하니까 일단 사무실로 들어가셨다가 오전11시까지 저희 사무실로 좀 와 주십시오』라고 통보했다.
***26面에 계속 ***25面에서 계속 金차관은 광화문 청사로 오면서 은근히 걱정되었지만『별일이야 있겠어.차관직 내놓으면 되겠지』라고 불안한 마음을 달랬다.안기부에서 준 시간여유가많지않아 사무실에 도착해 장관에게 인사만 한뒤 곧바로 남산으로향해야했다.
광화문에서 퇴계로를 지나 육중한 안기부 정문앞에 이른 그는 수사국장의 안내로 지하 조사실에 가둬졌다.
조사관은 일단『당시 발언내용과 모임참석자등 상황을 자세히 얘기하라』고 요구했다.꼬치꼬치 캐묻는 신문이 끝난 뒤에는『그럼 그런 얘기를 한 의도가 뭔지 얘기하라』로 이어졌다.私見이라는 주장에『다른 의도는 없었느냐』는 질문이 집요하게 계속되는 바람에 그는 오후5시쯤 되어서야 풀려날수 있었다.
***불순한 의도 늘 경계 적어도 통치권누수방지의 특명을 받고 있는 張부장의 입장에서 볼때 아직 임기가 1년여 남아 있는데 후계운운하는 발언은 당연히 조사대상일 수밖에 없었다.자신의임무에만 충실하고자하는 충직한 신하에게 현직차관이라는 타이틀 따위는 중요하 지 않았다.특히 盧대표와 절친한 金차관의 발언이기에「불순한 의도」를 의심하기에 충분했다.
金차관의 발언은 정말 盧대표의 후계구도를 가시화하고자했던 의도적 발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金차관은 이미 두차례나 의원직을지낸 정치인이며,이미 당시『盧대표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야겠다』는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金의원은 이에 대해『평소 내 생각을 얘기한 것 뿐인데 매우 민감하게 받아들여졌던 것 같다.차라리 차관직 물러나고 바깥에서盧泰愚대통령만들기나 해야겠다고 생각했다』며 발언에 깔렸던 복선의 의미를 감추지않는다.
이 사건이 지닌 권력갈등 측면의 의미는 盧대표의 반응에서 확인된다. 金차관은 풀려난 얼마뒤 연희동 盧대표집을 찾아갔다.盧대표는 金차관의 손을 잡으며『고생 많았다.이미 張부장의 보고를받아 알고 있다』는 말로 먼저 친구를 위로했다.
그리고 그는 이어『위에서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이 많이된다』고말했다.盧대표는 위(全대통령)에서 金차관의 발언에 대해 어떤 조치를 내릴지가 가장 걱정스러웠던 것이다.盧대표는 친구의 연행에 분노를 느끼기보다 全대통령의 심기를 먼저 생 각할 정도로 엎드려 있었으며,張부장의 연행은 곧 全대통령의 불편한 심기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張부장의 권력누수방지노력은 은밀한 음지의 노력만 아니라 언론에 대한 공개적인 탄압으로도 나타났다.
85년8월14일 학원안정법파문이 한창이던 당시 盧대표는 가락동 연수원에서 학원안정법통과를 위한 결의를 다지는 民正黨의원총회에 참석하고 있었다.그는 회의중 측근의 귀엣말을 듣고 급히 회의장을 빠져나간다.슬라이드를 상영하느라 어두운 회의장에서 盧대표의 움직임을 포착한 사람은 中央日報 金玄鎰기자였다.
곧바로 盧대표를 뒤쫓아간 金기자는 盧대표가 전화를 받는 것을보고「중요한 전화」임을 감지,측근에게 한마디 툭 던졌다.『영수회담 얘긴가 보지』-.학원안정법 파동와중에 신민당 李敏雨총재가청와대회담을 요구하고 있었던 때였기에 넘겨 짚 어 본 것이다.
측근의 고개가 끄덕였다.마감시간 직전 영수회담성사를 회사에 알릴수 있었다.
中央日報에만 영수회담성사사실이 1면 톱기사로 나오자 張부장은곧바로 中央日報 편집국장과 정치부장,국회담당 취재팀장을 남산으로 연행했다.회사밖에서 이 사실을 알게된 金기자는 특종을 했다는 죄로 바로 도망자가 되었다.中央日報 동료기자 들은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盧대표 주변 차단도 뒤늦게 사건의 비화가능성을 우려한 盧대표가 나섰다.『이러다간 전체언론과 척지게 된다』며 권력핵심부 설득에 나섰다.李相宰의원등이 진무특사로 남산의 張부장을 찾았다.도망중이던 金기자가 구속하지 않는다는 신분보장을 받고 자진출두,이틀만 에 中央日報 간부들은 풀려날수 있었다.
당시의 집중적인 조사내용은「취재원을 밝히라」는 것이었지만 金기자는 취재원을 밝히지 않았다.
張부장은 석간신문 마감시간전까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사람은 대통령과 비서실장,자신외에 盧대표쪽밖에 없음을 알기에 취재원을 盧대표쪽으로 확신했을 것이다.그런 張부장이 무리를 감수하면서 취재원을 찾고자했던 사실은「盧대표견제」라는 해석을 가능케한다. 張부장의 권력주변관리는 나아가 盧대표의 주변에 모이는 사람을 차단하는데까지 발전한다.국회의원.기업인등이 盧대표를 만나고 가면 張부장은 몰래 사람을 보내『무슨 얘기를 나눴느냐』『왜 그렇게 자주 만나느냐』고 추궁하는 등의 방법으로 사 람을 막았다. 물론 이같은 張부장의 권력보위행위는 과잉충성의 면이 적지않았지만 기본적으로 全대통령의 의중을 벗어나지는 않았다.오히려 부족했는지도 모른다.全대통령은 張부장의 힘이 닿지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자신이 적접 레임덕방지의 불호령을 내리기도 했기때문이다.
〈吳炳祥기자〉 ………………………… ◇편집자註:『청와대비서실』의 필자가 정치부 朴普均기자에서 吳炳祥기자로 바뀌었습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