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 무방비 국가신경망(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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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원인이 정확히 밝혀지진 않았지만 단순해 보이는 화재사고로 국가의 중추신경이 마비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10일 오후 서울 종로5가의 통신구 화재는 얼핏 듣기에 하찮은 사고로 보였지만 그 여파는 어마어마하다. 정보화시대의 통신망 보호가 국민생활과 국가안보에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서울을 비롯,전국 일부지역에 유·무선 및 국제전화가 두절되고,방송이 일부 마비되는가 하면 무선호출기·컴퓨터통신이 벙어리가 되고,금융기관의 전산망이 다운되는 공황사태는 실로 가공할만한 것이었다. 완전한 원상회복엔 한달 이상 걸리겠다니 걱정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원인조차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니 또다른 재난이 없으리란 보장조차 없는 셈이다.
지금 정부는 모든 행정기능을 포함해 국방문제까지도 전산화한다는 방침을 정해놓고 이미 이에 착수한 것으로 알고 있다. 가령 국가기능의 정부가 전산화되고,그 기능을 연결하는 통신케이블에 국가운명을 걸고 있는 상태에서 또 이같은 사태가 온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첨단소재로 알려진 고성능의 광케이블이야말로 국가안보의 중추신경이란 점을 새삼 느끼게 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번 사고가 우리 사회에 몇가지 반성과 교훈을 주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먼저 이를 맡아 관리하고 있는 당사자들이 평소 철저하고 완벽한 관리에 소홀함이 없었느냐는 점이다. 원인이야 어디에 있든 화재가 났을 때 경보를 받고 즉시 대응할 수 있는 체제를 유지해왔는가. 보도로는 화재발생 자체를 주민이 신고됐고,소방작업은 쇠창살을 뜯어낸뒤에나 가능했다니 도대체 사고무방비지대에 방치해온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렇다면 화재가 발생하더라도 웬만한 불씨에는 견딜 수 없는 조치는 취하고 있었는가. 그것도 아니었다. 인화 및 가연성이 높은 재질로 덧씌워져 있었다는 것이다. 10년전 일본에서 똑같은 사고로 홍역을 치른 선례를 전문가들이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땅속에 묻혀 보이지 않으면 불의의 사고에 대비하거나 어떤 조건에서도 보호되어야 하는 통신케이블조차 연결해서 묻는 것으로 그만이란 안이한 생각은 아니었는지 반성해 볼 일이다. 이번 사고로 우리는 국가의 신경망을 흔들 수 있는 취약점을 새삼 인식하게 됐다. 만일에 있을 수 있는 사보타주 등 인위적 재난에 대비하는 체제도 강구해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이번 사고가 지금 땅속에 미로처럼 얽혀있는 각종 케이블의 효율적 관리와 보안시스팀을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전선과 통신선,하수도와 상수도,지하철과 지하건물 등 각종 지중시설물이 난마처럼 얽히고,어떤 곳의 지하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효율적 관리나 안전보장은 어려울 수 밖에 없다. 국가차원에서 각각 다른 관리주체의 효율적 조정을 검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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